박유한 논란에서 엿볼 수 있는 가장 흥미로운 지점중의 하나는 '인식'과 '현실'의 당연한 괴리라는 것이다. 이런 말을 하다보면 사람들이 살짝 착각을 일으키는 지점이 있는데 '언행일치'라는 것이다. 여기서 '언'은 '생각/인식'으로, 행은 '현실'로 파악하는 경향이 있는데 실제론 그런 것은 거의 불가능하고 오히려 '언'도 일종의 행위이자 현실로 파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즉 '생각'은 여러 모로 판단할 수 있지만 '언'을 '행위'로 놓고 두 가지를 일치시키라는 의미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이렇게 판단하는 이유는 만약 '언'을 '생각/인식'이라 놓는다면 '인식'을 현실의 한계에 맞출 수 밖에 없고 이런 경우 '생각/인식'의 범위 자체가 지나치게 협소해질 수 밖에 없는 부정적인 상황에 놓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사실상 '생각/인식'이란 층위는 기존의 현실에서 벗어난 전복적 사고 자체가 불가능해지는데 그건 '생각/인식'의 역할을 지나치게 축소하는 결과를 낳게 되고 이건 인간의 특성을 무시하는 결과다.
아무튼 그렇고 본론으로 들어가보자. 일반적으로 인식은 현실보다 그 범위가 더 넓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인간의 자명한 특성으로 보며 '사상의 자유'를 보장함으로서 제도적으로도 그것을 보증해주는 편이다. 반면 현실은 인식의 다양함과는 달리 대체로 단순한 형태, 혹은 복잡하더라도 일종의 우선순위가 존재하는 방식으로 드러나는 것이 보통이다.
이런 도식이 거꾸로 적용되는 경우도 있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는 바로 '이분법'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흔히 알려진 대로 부정적인 면만 있는 건 아니다. 이분법이 가지는 가장 큰 장점은 문제의 본질을 명확하게 보여준다는 점이다. 즉 전선을 형성하는데 가장 유효한 방식이다. 반면 이는 단순화할 수 없는 현실과 인식적인 차원에서 단순화한다는 약점이 있다. 예를 들면 계급을 이분법으로 보면 '유산계급/무산계급'이란 대립항이 형성되는데 알다시피 이는 극단적으로 단순화된 인식의 차원에서 성립할 뿐이다. 즉 세상은 '이건희'아니면 '노숙자'란 대립구도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니까.
즉 계급은 페스트리 빵처럼 겹겹이 쌓인 형태로 드러나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내가 어느 겹에 속하는가에 따라서 한 편으론 유산계급이자 지배자 다른 편으론 무산계급이자 피지배가가 되는 것이 보통이며 계급이란 관계열을 벗어나서 다른 관계열에 속하면 이 관계역시 역전될 수도 있는데 대체로 인간은 수많은 관계열을 담지하는 존재인지라 그 계급적, 사회적 위치는 매우 복잡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인식은 그 모든 관계열을 모두 고려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특히 구체적인 상황을 전제하지 않은 채 이런 부분을 다루다 보면 이런 특성이 강화되는 경향이 있다. 주로 각종 학문들에서 기본적으로 다루는 이른바 원론서들이 현실과 괴리된 것처럼 받아 들여지는 이유기도 하다.
인식의 활동이 그런 범위까지 포괄하게 되면 문제가 너무 복잡해지는 것이 아닐까 싶지만 사실 그렇진 않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현실은 인식의 다양함과는 달리 대체로 단순한 형태, 혹은 복잡하더라도 일종의 우선순위가 존재하는 방식으로 드러나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즉 현실에서 다양한 시각들이 얽힌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그 문제를 해결하는게 있어선 일종의 우선순위가 있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단 여기서 주의할 부분은 우선 순위가 부여된다고 해서 그것이 다른 문제들에 비해서 더 중요한 것이란 의미는 아니다. 단지 특정한 구체적 현실에서 그것이 조금 더 앞서서 해결할 문제가 될 뿐이다. 만약 같은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드러난 상황이 다르면 우선순위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박유하 논란에서 그런 증상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런 거다. 전쟁이란 일반적으로 인식적인 차원에서 제국주의적 지향이 현실적에서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형태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알다시피 제국주의란 기본적으로 우월주의라는 계급적 차별이 기인한다. 결국 전쟁이란 제국주의, 계급과 분리할 수 없는 현상이다.
그래서 전쟁은 그 영향력 안에 속한 이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적용되는 성향이 강하지만 그것이 개인, 각종 계급적 관계열에서 서로 다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이들에겐 다른 영향을 미치는 것이 보통이다. 이를 테면 전쟁을 일으킨 국가의 최상위 계급인 이들에게 전쟁에서 패하지 않는 한 별다른 피해가 가지 않는 것이 보통이지만 전쟁 상대국, 혹은 점령국, 식민지의 국민들은 설령 그가 최상위 계급이라고 할지라도 가해국의 최상위 계급과 똑같은 지위를 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심지어 식민지 국가의 하위계급이자 전근대적 가치관이 지배하는 시대에 태어난 여성이라면 앞서 언급한 이들보다 훨씬 더 심각한 피해를 입을 수 밖에 없다.
이건 특별한 현상이 아니라 지극히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런데 박유하는 프레시안 인터뷰에서 이에 대해 다소 모순적인 이야기들을 하는데 그중 하나는 '이 문제가 언급된 적이 없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전쟁이란 시각이 아니라 제국이란 시각에 방점을 찍었다'는 말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전쟁은 제국주의, 계급과 떼어서 생각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니다. 심지어 이건 내가 고안해낸 새로운 이론도 아니고 이미 잘 알려진 지극히 일반적인 이야기다. 일본군 성노예라는 구체적인 사례로 들어가도 마찬가지다. 그에 대한 지적은 이미 많이 나와 있다. 박유하의 언급이 처음도 아니다.
특히 그가 전쟁에서 일본군 성노예 할머니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 언급한 것이라면 그 모든 것이 동시에 고려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물론 실제로 그의 저술에선 그런 내용이 들어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프레시안 인터뷰에선 그것을 뒤집는 발언을 하는 것이다. 왜 이런 모순이 발생하는 걸까? 난 그 원인을 그의 저술과 현실이 다르다는 점 때문이라고 본다. 즉 그는 일본군 성노예 문제는 그렇게 접근하는 것이 맞지만 정작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현실적 방안은 그런 문제와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알다시피 우리가 역사적 사실을 다루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 역사적 사실로부터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서'다. 그는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과 해결방식은 달라도 괜찮다고 본 듯 하다. 그런데 이는 원인과 결과, 그리고 그 결과가 또 다른 시작을 내포하고 있다는 초보적인 사실을 부정하는 행위다. 즉 박유하의 주장대로 사실상 대부분 국가의 자금이 투입되었다곤 하지만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나 사죄가 전제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민간보상에 동의해주는 것은 결과적으로 현재 일본 정부가 취하고 있는 부정적인 태도를 용인해주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 문제가 단순한 보상이 아니라 전쟁범죄라는 차원에서 보자면 이런 류의 해결은 한국에게도 일본에게도 심지어 같은 문제를 갖고 있는 동북 아시아 전체에도 도움이 되지 못 한다.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박유하의 지적에 대해 동의하는 편이기도 하지만 만약 현배 박유하가 이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이런 차원의라면 나로선 별로 동의할 수가 없다. 이건 지나치게 자의적이고 편의적인 해석이기 때문이다.
'구름먹고 바람똥'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인간은 이기적이다? 아니 주관적이다. (0) | 2014.08.29 |
|---|---|
| 선거공학 (0) | 2014.07.18 |
| 박유하 논란. 나가며. (0) | 2014.06.19 |
| 박유하 논란. pt-3. (0) | 2014.06.19 |
| 박유하 논란. pt-2. (0) | 2014.06.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