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과 비정규직
이랜드라는 기업이 있다. 한때 기독교인을 우대한다는 채용조건을 내걸어서 내 반감을 심하게 산 기업이다. 지금도 그 채용조건을 유지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 조항자체는 매우 차별적인 요소이기에 시대적으로 봤을 땐 이미 사라졌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난 아직 그 조항이 사라졌을 것이란 확신이 들지 않는다. 대저 종교를 앞세우는 이들의 무식함은 하늘위에 앉아 계시는 자기들 신의 똥꼬를 찌르고도 남음이 있음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네들의 신이 그들을 그렇게 가르쳤는가 하면 그렇진 않다. 세상 어느 종교도 사람들에게 그런 가르침을 내리진 않는다. 영화 '넘버 3'에 나온 마동팔 검사의 대사를 인용하자면 이렇다.
"신이나 종교가 무슨 죄가 있어! 그것들을 믿는 넘들의 잘못이지."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현상이 벌어지는 걸까? 예수나 부처가 왜 저자거리로 나섰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 하기 때문이다. 난 종교의 가르침이 세상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지만 꼭 그 가르침을 말미암지 않고선 구원이 이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면 이미 구원따위와는 담을 쌓은 단순 공갈협박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사람이다. 그런데 우스운 일은 대저 종교를 믿는다는 사람들중 또 상당수가 이런 류의 자기폐쇄적 동종교배의 함정에 빠져 자기들끼리 허우적거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기 종교의 선지자들이 말씀하시길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라 했지만 그들에겐 구원이란 오로지 자기들 신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맹세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믿는 파시스트들이다.
사람들이 그렇게 되는 이유는 사실 매우 단순하다. 그리고 종교에겐 약간 미안하지만 그것은 종교 자체가 가지고 있는 함정이기도 하다. 종교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약속한다. 그리고 그 구원의 실체는 다른 무엇보다도 '평정한 마음'이다. 세상 모든 이들이 애타게 갈구하는 것을 종교는 제공한다. 그런데 그 구원을 얻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 역시 '한 점의심의 여지없는 무조건적 믿음'이란 것이 문제다. 게다가 종교가 상정하는 신이란 그런 믿음을 바치기에 부족함이 없는 존재가 아니던가. 이 단순한 고리속에 함정이 존재하는 것이고 그 함정에 빠진 이들이 흔히 말하는 '세속과 분리된 자기들만의 폐쇄적인 별천지'로서의 종교를 믿는다.
그리하여 그들의 눈엔 세상 모든 고통과 시름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된다. '비판과 의심의 과정이 생략된 무성찰적이고 무조건적인 믿음을 바탕으로 한 폐쇄적 종교인들'이 몰상식의 쳇바퀴를 돌리고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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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나 부처가 살았더라면 지금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못 가진 자들의 절규를 외면하고 자기들의 신을 위해 공물이나 바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