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ki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나누어 짊어진다는 것의 의미

The Skeptic 2009. 2. 17. 03:31

 

<상처는 과연 치유가능한 것일까?>

 

영화에선 그것이 가능한 것처럼 나온다. 서로의 비슷한 상처를 드러내보임으로서 치유를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난 이 견해에 대해서 부정적이다. 원인이 무엇이든간에 '정신적 트라우마'는 쉽게 잊혀지는 것이 아니다. 잊기 위해 발버둥칠수록 더욱 빠져드는 모래 늪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치유에 가까운 상태로 만들어 주는 것이 있다면 영화에서 말하는 것처럼 '용서'다. 윤수가 죽인 (사실은 아니지만) 가정부의 할머니가 윤수를 용서하고 유정이 자신의 어머니를 용서하는 것은 단순히 나에게 해를 끼친 누군가의 죄를 사하여 주는 행위가 아니다.

 

트라우마가 우리를 괴롭히는 가장 큰 원인은 그것이 가리키는 방향이 늘 과거이기 때문이다. '그 때 이렇게 했더라면', '그 때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더라면' 하는 식이다. 그러나 그것을 되돌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용서'란 행위는 무엇보다도 과거에 대한 미련을 버리는 것이며 과거에 묶여 있는 자신의 영혼을 현재로 되돌리는 행위다. 그리고 일정한 수준의 거리두기란 사람을 침착하게 만들며 완벽하진 않지만 사건에 대한 제 3자의 시각을 제공해 준다. 그 때부터 사람은 '그럼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이것이 '용서'란 행위가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이다.

 

그렇다곤 해도 이 '용서'가 치유의 수준으로 가는 것은 만만치 않다. 대한민국 영화계의 마에스트로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이 바로 그 지점을 정확히 보여준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용서와 구원에 관한 영화중 가장 탁월하지 않나 생각한다. 물론 내가 본 영화들로 한정지어서) 인간의 용서란 종교에서 말하는 신의 용서와 같을 수가 없다. 물론 독실한 종교인들은 그런 단계에 이르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나같은 무신론자에겐 요령부득인 설명일 뿐이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인간이 신의 용서를 흉내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이미 자신의 마음속에 바벨탑을 쌓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아무튼 무신론자인 내가 볼때 인간의 용서는 결코 완벽할 수가 없다. 그래서 다른 것이 또 필요하다.

 

농담처럼 하는 말중에 이런 것이 있다. 'PX 방위도 군생활은 힘들다' 인간은 누구나 '상처'를 지니고 산다. 그 상처가 그의 정신과 생활을 얼마나 지배하는가의 문제가 남지만 말이다. 아무튼 인간은 누구나 상처가 있다. (혹자는 그 상처들의 경중을 따지려 들기도 한다. 그러나 상처란 어차피 매우 주관적인 것이라서 그런 시도자체가 의미가 없다) 그 때문에 인간은 필연적으로 서로 의지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윤수와 유정이 서로의 상처를 털어놓으면서 공감대를 형성하고 서로에게 의지가 되어가는 것처럼. -- 때로 이런 것이 필요없다는 사람들을 보게 되는데 대개 세 부류다. 나이가 아주 어리거나, 정신병적 징후를 보이거나, 역설적으로 그에 대한 욕구가 너무 강렬하거나.

 

내가 생각하는 '사랑' 이란 그런 것이다. 세간에서 흔히 많이 회자되는 낭만적인 사랑도 썩 괜찮을 테지만 솔직히 그런 기대는 별로 없다. 외려 더 간절한 것을 고르라면 나의 상처와 두려움을 함께 나누어줄 사람이다. 나이를 꽤 먹은지라 주변엔 결혼한 지인들이 꽤 된다. 그들중엔 애 잘 낳고 알콩달콩 잘 사는 것들도 있지만 못지않게 실패한 사람들도 꽤 된다. 생각보다 그 숫자가 많음에 놀라고, TV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다종다양한 형태의 실패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그리고 다양한 실패들안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는 것도 놀랍다면 놀라운 사실이다. 그들은 타인에게 자신의 상처로 인한 짐을 나누어 져달라고 요구하지만 타인의 짐을 나누어 질 생각은 없다.

 

글을 다 쓰고 나니 문득 친구에 대한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뜻풀이가 생각난다.

 

"나의 슬픔을 자신의 등에 지고 가는 자"

 

친구가 그럴진대 하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