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은 늘 시궁창

기본 신뢰관계의 문제

The Skeptic 2009. 5. 7. 18:10

<부산지법 제5민사부(고재민 부장판사)는 7일 부산대에 305억원을 기부하기로 하고, 195억원을 쾌척한 뒤 학교 측이 기부금을 유용했다며 나머지 110억원을 내지 않은 송금조 ㈜태양 회장 부부가 부산대를 상대로 낸 채무부존재 확인소송에서 원고의 청구를 기각했다.

재판부는 "원고는 기부금이 부담부증여(負擔附贈與)라고 전제한 뒤 '부산대가 기부금을 양산캠퍼스 부지 대금으로 사용해야 할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으니 증여계약을 해지하고, 나머지 기부금을 출연할 수 없다'고 주장하지만 이 기부는 부담부증여로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부담부증여는 기부를 받는 쪽이 구체적인 의무를 져야 하는 증여다.
재판부는 송 회장 부부가 기부금의 사용목적이나 사용방법을 지정했다고 해서 법률상 부담부증여라고 볼 수는 없다고 판단,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 것이다.

재판부는 또 "원고는 부산대가 자신의 명예를 훼손해 증여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원고가 제시한 자료내용을 볼 때 원고의 인격까지 객관적으로 손상했다고 보기 어려운데다 소송제기 시효(6개월)도 지난 만큼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부산지법 백태균 공보판사는 "기부받은 쪽이 기부금을 기부 목적대로 사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기부 약속을 해제할 수는 없다는 것"이라며 "부산대가 기부금을 기부목적대로 썼는지는 판단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법이란 건 일반 상식과 많이 다르다. 그렇다고 법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일반 상식이 논리적인 근거를 결여하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결국 법리와 일반 상식의 괴리감은 둘중 어느 쪽이 더 논리적인 정합성을 갖추고 있는가에 의해 좌우된다. 그렇다면 이 경우엔 어떨까?

 

일반적으로 기부를 하는 경우 '그냥 대충 알아서 잘 쓰라'고 하는 경우가 더 많을까? 아니면 구체적인 용처를 기대하는 경우가 더 많을까? 얼마 안 되는 기부를 해본 내 경우엔 100% 후자였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전자의 경우가 더 많을 것이라고 생각되며 앞으로 그런 기부가 더 늘어나는 것이 좋다고 본다. 하지만 이 경우엔 기부금을 받아서 사용하는 단체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관계가 형성되어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위의 경우처럼 기부받아 사용하는 당사자가 기부자의 의도와 무관한 방식으로 사용했다면 과연 <신뢰관계>라는 것이 성립할까? 그럴 가능성은 커보이지 않는다. 기부를 하는 입장에서 기부금의 용처가 뒤바뀔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상호 확인서를 작성하고 심지어 법적인 효력을 갖기 위해 공증절차까지 밟아야 한다면 누가 가벼운 마음으로 기부를 할 수 있겠는가? 이건 기부하지 말라는 말과 다를 바가 없다. 대개의 일반적인 사람들은 이런 확인 절차를 매우 귀찮아 하기 때문이다.

 

법이란 게 그 자체로 정합성을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 법적인 영향력이 사회 전반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점도 인정한다면 이번 판결은 아무래도 좀 무리가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