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녀] 이야기 만들기에 실패하다.
인간에게 발생하는 거의 모든 일들이 이야기의 소재가 될 수 있다. 아무리 하잘 것 없는 일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재발굴에 힘을 쓰는 이유는 소재가 참신하거나 흥미로운 것일 경우 이야기를 만들어 가기가 훨씬 수월하고 그 자체로 대중적인 관심을 끌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지나치게 소재에 집착하다 보면 정작 이야기는 사라지는 본말이 전도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궁궐, 궁중생활이나 종교같은 건 참 좋은 소재다. 이런 곳들의 특징이 일반적이지 않은 생활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지고 평범한 사람들이 생각하기 힘든 규칙이 존재하며 그 규칙의 준수여부에 따른 상벌이 엄격하게 이루어지는 탓이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는 거의 대동소이하다. 때문에 인간 사회의 규칙이나 관습이란 것 역시도 그 테두리에서 많이 벗어나지 않는 것이 상례다. 그러나 알다시피 이른바 궐안의 생활이나 산사, 성당, 수도원의 생활은 일반적인 상례를 넘어서는 수준의 규율을 요구한다. 물론 인간은 적응하는 동물이기에 상식을 넘어서는 수준의 규율이라 하더라도 지킬 순 있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인간의 욕망은 거의 대동소이하다. 고로 상벌에 따른 위협이나 유인이 존재하더라도 늘상 빈 곳을 찾아 튀어 나오게 마련이다. 이런 공간과 상황은 그 자체로 좋은 이야기 소재일 수 밖에 없다. 영화 '궁녀'도 그 지점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말이다. 왜 이야기가 그렇게 흐르게 되었는 지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으나 전형적인 장르물인 서스펜스물에서 출발하더니 어느 순간 갑자기 악령이 등장하는 오컬트로 변화한다.
이런 류의 전환은 관객을 굉장히 당황스럽게 만들 수 밖에 없다. 마치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들이 그런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대놓고 그런 영화를 표방한 것도 아닌 경우라면 더더욱. 그렇다면 왜 그랬을까? 만약 처음부터 그렇게 만들 요량이었다면 적어도 이야기가 전환되는 시기, 그리고 그 전환을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 부정확하게 이루어졌다고 봐야할 것이다. 뭐 그럴리는 없겠지만 어쩌다 보니 그리 되었다면 시나리오를 만들기 위한 자료수집이 부실했다고 볼 수 있다. 후자의 경우엔 상당한 수준의 억측이 존재하기에 설명으로 보기엔 부적절하지만 어쨌든 어느 경우든 이야기를 만드는 데 실패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런 류의 실수는 이야기가 예측가능하다는 것보다도 더 큰 문제다.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무슨 연유로 월령이 살해되었는지 알 수 있었으나 이런 류의 영화에서 그런 것은 큰 흠이 아니다. 관객의 뒷통수를 치는 반전이 아니어도 충분히 극적 긴장감을 드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극적인 반전이 있다면 더 좋겠지만 그런 장치의 맹점은 어지간한 영화광들에겐 잘 안 통한다는 점이다. 고로 반전에 목을 매는 건 그다지 좋은 전략이 아니다.(주1)
영화는 문학과는 달리 문자로 이루어지는 예술이 아니다. 대사보다는 연기, 몸을 통한 의사전달이 절대적이다. 고로 어떤 대사가 하나의 사건의 발단, 혹은 전개에 있어서 결정적인 선언으로 이루어지면 조금 곤란하다. 말하자면 대사란 하나의 의미를 가진 연기들이 지속되는 가운데 상징적으로 강조점을 찍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그런데 영화가 중반을 넘어가는 지점에서 월령 살해를 주도한 상궁이 이런 말을 한다.
"월령이 얼마나 탐욕스러웠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그러나 불행히도 그런 내용은 이전에 둥장하지 않는다. 스쳐 지나가는 장면과 대사들은 있었다. 그러나 그 장면들은 영화의 앞뒤 사정을 고려해 볼때 '암시'라기 보다는 외려 충분히 이해가능한 것들일 뿐이었다. 임금이 내린 비단과 노리개를 독차지한다든지 하는 것들은 월령과 원자를 생산한 후궁과의 개인적인 관계와 극중 반전 요소들을 고려해 볼때 '월령의 탐욕스러움을 증명하고 암시하는 장치'로 보기엔 부족했다. 오히려 상궁의 그 대사가 선언으로 등장한 이후 월령은 갑작스레 탐욕스런 인물로 변화하고 오컬트 영화의 주인공이 되었다.
다른 영화적 요소들이나 뛰어난 디테일 묘사, 몇몇 충격적이고도 탐미적인 장면과 상황들이 존재하는 영화들임에도 불구하고 별 관련없는 두 영화장르를 무리하게 혼합하다 보니 발생한 타란티노적인 방향전환은 이 영화의 이야기에 치명타를 가했다고 볼 수 있다.
주1)
반전이라면 빼놓을 수 잆는 영화, '식스센스'를 함께 보기전에 몇몇 영화광들과 내기를 했었다. 제일 늦게 알아 맞추는 사람이 짜장면을 사기로. 물론 말을 할 순 없으니 쪽지에 적어 놓기로 했었다. 먼저 본 한 사람이 심판이었고. 아마도 그 내기에서 내가 짜장면을 샀었던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못 맞추어서가 아니었다. 단지 제일 늦게 알아 차렸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영화 시작하고 중반쯤이었는데 말이다. 이런 영화광들에겐 어지간한 반전가지곤 명함도 못 내민다.
p.s.
옥진 역의 임정은과 정렬 역의 전혜진의 연기는 예상보다 매우 훌륭했다. 김남진 역시 의외로 사극에 잘 어울렸고 월령 역의 서영희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가장 뛰어났던 것은 역시 각 상궁 역을 해낸 중견 배우들이었다. 남조선 영화판의 든든한 버팀목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