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먹고 바람똥

선택 part 1

The Skeptic 2010. 1. 20. 02:01

다들 알다시피 인생이란 건 늘상 선택의 연속이다. 너무 사소해서 알 필요조차 없는 일까지도. 심지어 별다른 갈등조차 일으키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들조차도 실은 '훈련된' 선택의 과정일 뿐이다. 여기에 그와 관련된 질문이 하나 있다. 딱 잘라 답하기 좀 곤란해 보이는 애매한 질문이다. 

 

"만인을 만족시킬 수 있는 선택과 옳은 선택이 있다면 당신은 무엇을 선택하겠는가?"

 

대체로 이런 질문은 현실적이지 않은 일종의 말장난이자 다소 정치적으로 편향적인, 그래서 부정적인 함의를 담고 있는 잘못된 질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질문자체의 문제에 집중하지 않는다. 이유는 단순하다. 사람들은 선택할 수 있는 답의 폭이 넓어질수록 다양한 고민을 하게 되는 경향이 있는 반면 선택의 폭이 줄어들면 고민보다는 정답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주관식이 아닌 객관식의 경우 답안의 수가 고민의 폭을 넓히는 효과를 내는 셈이다. 

 

일단 이 질문의 문제는 바로 '만인을 만족시킬 수 있는 선택'이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만약 세상에 신이 실존하고 그 존재와 무한한 능력을 누구나 알고 있다 하더라도 단 한 명의 무신론자가 존재하는 한 만인을 만족시킬 수 있는 선택 혹은 답이란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의 다양성이란 고유한 특성이 사라지지 않는 한 존재불가능하다는 말이다. 고로 '만인을 만족시킬 수 있는 선택'이란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개념을 상정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전체주의적인 발상인 것이다. 이 경우 일단 질문은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다수를 만족시킬 수 있는 선택과 옳은 선택중 무엇을 선택하겠는가?"

 

물론 이 질문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바로 '옳다'는 것이 무엇을 지칭하는가 하는 문제다. 절대적인 진리나 정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익히 알려진 상황에선 더더욱. 그렇다고 이 문제를 단순한 개인의 선택의 문제로 돌려 버리는 것 또한 매우 무책임한 행동이기는 마찬가지다.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있다면, 아! 물론 그렇게 주장한다면 당신은 중딩 사회 선생님에게 볼기짝을 두드려 맞을 테지만,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겐 사회성따위는 쥐뿔만큼도 없어서 짐승들과 다를 바 없는 삶과 질서를 통해 살아간다고 가정하면 가능한 일이기는 하다. 강조하지만 사회선생님들은 당신을 패버릴 것이고. 뭐 아무튼 이건 답하기 쉽지않은 질문이기에 여기선 깊게 다루지 않기로 하겠다. 다만 제한적인 범위내에서 '옳은 것'이 존재함을 인정하고 이야기를 더 진행해보자. (주1)  

 

이 쯤에서 재미있는 반론이 하나 등장할 것이다. 너무너무 고루해서 그만큼 짜증이 나는 질문이지만 불행히도 여전히 대다수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갖고 있는 질문이다.

 

"다수가 만족하는 것이 옳은 선택 아니냐?"

 

매력적이지 않은가?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결해 버릴 수 있는 답안이니 말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진실이 아니다. 다수가 선택한다면 그게 제 아무리 거지같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안 따라갈 재주가 없으니 투덜대면서 따르겠지만 그렇다고 옳은 것은 아니다. 모두 알다시피 내가 죄박이를 뽑은 게 아니다. 그런데도 그는 내가 속한 어떤 집단의 우두머리다. What the... 그건 그냥 '다수가 선택한 것'일 뿐이다. 그 이상의 의미는 전혀 없다. 민주주의가 다수결 원칙이라고 알고 있는 건 알다시피 극동 아시아 구석탱이의 어느 정신나간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 이야기일 뿐이다. 상황과 변수들을 전혀 감안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적용하자면(주2) 히틀러도 적법한 과정을 통해 선택된, 즉 다수에 의해 선택된 지도자다. 위대한 게르만 민족이 아닌 열등한 유색인종들 따위가 어찌 그를 비난할 수 있겠는가? 

 

자! 꽤 많은 이야기를 떠들었지만 우린 결국 다시 질문으로 돌아왔고 불행히도 질문은 아직 그대로다. 아니... 조금 바뀌긴 했다.

 

"다수를 만족시킬 수 있는 선택과 옳은 선택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말도 안 되는정치적 편견과 음모를 제외한 질문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리고 '다수를 만족시킬 수 있는 선택'과 '옳은 선택'이란 것이 자동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란 것도 말했다. 즉 뒤집어 말하자면 이 두 가지 선택은 대개의 경우 양립가능하다는 즉 하나의 사안에 대해서 '옳은 선택'과 '다수를 만족시킬 수 있는 선택'이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선택하겠는가? 

 

이 질문이 담고 있는 의미부터 살펴보자. 우리에겐 이미 '옳은 선택'이란 답이 존재하는데 굳이 그 옆에 '다수를 만족시킬 수 있는 선택'이란 항목이 따라붙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주 단순한 이유다. 비록 옳지 않거나 혹은 절반쯤 옳을 순 있지만(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주3)) 그 나머지 부분은 결국 타협하는 선택이란 의미다. 이런 경우 '옳은 선택'을 하는 경우에 비해선 분명 더 많은 이들을 만족시킬 수가 있다. 


다만 이 경우에 좀 더 신중해질 필요가 있다. '타협을 통한 다수의 만족'이란 사실 아무도 만족하지 못했다는 것과도 비슷한 의미이기 때문이다. 타협을 위한 대의가 실로 엄청난 것이라면 불만족스러움은 꽤 오랫동안 잠복하거나 심지어 사라질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도 균열을 일으킬 것이란 의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옳은 선택'을 하는 것이 옳다는 말은 아니다. 일반적인 경우 '옳은 선택'을 하는 것이 늘상 좋은 결과를 낳지만 한 편으로 그런 선택이 많지 않았기에 세상이 요 모양 요 꼴이란 사실도 곱씹어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