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per] 덕혜옹주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
오늘자 경향신문에 소설 '덕혜옹주'에 대한 소개글이 실렸다. 그 소개글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잊혀진, 외면당한'
난 알고 있었다. 그 소설 책이 출판된 게 아마 작년 말쯤이었을 거다. 연말이고 해서 학교 선후배들 모임을 가졌는데 모인 찻집에서 지인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해 꽂아둔 책중에 한 권이었다. 일찍 온 후배 한 명이 그 책을 읽고 있다가 대단한 거라도 발견한 양 물었다. '옹주가 뭔지 아는지. 덕혜옹주가 누구인지'
옹주란 후궁이 낳은 딸이다. 공주가 되지 못하는 신분이지만 왕족이다. 그리고 덕혜 옹주는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고종의 딸이다. 일제의 조선 문화 말살 정책,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동아시아 공영권 건설을 위한 내선일체의 일환으로 일본으로 압송되어 조선 본국과 일본 모두에게서 버림받은, 그리고 실제 인생도 비극적이었던 인물이다. 아마도 일제 강점 초기의 가장 비극적이었던 인물을 꼽으라면 난 고종이 아니라 명성황후와 덕혜옹주를 꼽을 것이다.
조선에 대한 일제의 강점에 대해서 사실 당시 남자들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야 한다. 여성들을 인간이 아닌 가문의 부속품처럼 취급하던 시절이었고 그 상황에서 벌어진 비극에 대한 책임은 고수란히 모든 권리를 독점했던 남성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여성들은 아무런 죄도 없이 이중으로 희생당한 것이니까. 제 나라 여성들조차 지키지 못한 남성들이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몇 년 전 서대문 형무소를 개조하여 독립을 기리는 역사 박물관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이 나왔었다. 그리고 당시 계획안에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기념관이 세워진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그러자 광복회 늙다리들이 그걸 반대했단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독립에 기여한 게 없는데 왜 자신들과 같은 급으로 취급하느냐는 논리였다. 무엇이 더 창피한 일인가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하더라. 그런 시절을 살아온 사람들이니 어쩌면 당연한 것이고 이해할 수 있는 일 아니냐고. 쉽게 타협하자면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조선 역사를 통틀어 이른바 선비정신을 강조한 이들치고 그런 식의 사고방식을 정당한 것 혹은 옳은 것이라고 평할 이들이 있을까? 없다. 그 광복회 늙다리들은 어느 시대에 가도 그저 모질이들일 뿐이다.
그리고 더 불행한 것은 그 광복회 늙다리들이 지금 바로 우리의 초상이라는 것이다. 성공만이 모든 것을 설명해 준다는 철저한 결과주의가 판치는 나라. 과거의 실패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실패는 기억해선 안 될 창피한 심지어 불경한 이름인 양 치부해 버리는 반성없는 사람들. 그 성향이 그동안 우리의 기억에서 덕혜옹주를, 한때 민비라 불렸던 명성황후를, 그리고 5.18을 앗아가 버렸고 지금도 그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불경이라 일컫는 이들이 권력을 잡고 있는 세상을 만들어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