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인지 체계에 대한 소고 pt.1
며칠 전 경향신문 인터뷰 코너에 모 교수가 나왔었다. 최근에 '통섭'이란 개념과 관련된 책을 하나 출간했단다. '통섭'이란 개념은 서양의 어느 자연과학자가 분과 학문간의 벽을 허물고 교류해야만 한다는 취지에서 주장한 내용을 그 제자였던 국내 어느 교수가 소개한 것이다. 그런데 그 개념을 인문학자인 다른 교수가 분과학문간의 평등한 위치에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학에 인문학을 종속시키는 것이라고 비판했단다. 그리고 이번에 책을 낸 교수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분과학문간의 문제가 아닌 인간의 인식 체계와 관련된 영역으로 더 확장시켰단다. 즉 과학과 늘상 평행선을 이루는 종교적 개념으로 많이 알려진 영성 혹은 초이성(사실 이게 뭔지 난 잘 모르겠다) 직관같은 것도 인간의 인지적, 경험적 이성과 같은 층위에서 다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참고로 그는 사회과학자다.
오늘은 그와 관련된 조금 뜬 구름잡는 이야기.
1. 통섭 개념은 분과학문간의 위계화와 서열화를 조장한다?
난 기존의 통섭 개념이 특정 학문에 대한 종속화에 불과하다는 비판에 대해서 솔직히 공감하기 힘들다. 인간의 인식 체계는 기본적으로 자신에게 편리한 방식으로 작동하게 마련이다. 같은 사물을 인지하고 기억하는 방식이 사람마다 조금씩 다른 것처럼. 그리고 이 '편리함'이란 단어의 다른 의미는 '익숙함'이다.
분과 학문간의 통섭이 가능한 이유는 대체로 두 가지 이유때문이라 볼 수 있다. 각 학문들간에 유사점이 존재하던가 특정 학문의 연구결과물이 다른 학문의 영역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거나. 정확친 않지만 내 판단엔 두 가지 모두 가능하다. 문제는 이런 이유들로 통섭의 과정이 가능하더라도 결정적인 변수가 존재한다.
이 책을 지은 이가 지적한 것처럼 주체의 문제다. 객관을 생명으로 한다는 서구의 실험과학조차 연구주체의 의도가 개입되는 것을 제어하지 못한다면 과학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한다. 그러나 이 지적은 사회과학의 영역에 주로 등장하는 문제이지 자연과학의 주된 문제는 아니다. (이 문제는 심지어 인문학보다도 사회과학이 더 심각하다) 자연과학의 주된 문제는 오히려 선명한 결과를 위해 실험과정에서 지나치게 많은 변수들을 제거하는 탓에 실험 결과를 실제 현실에 똑같이 적용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다. 예를 들자면 동물 실험을 통해 안전성이 증명된 새로운 의약품은 인간에게도 안전할까?
비슷한 의미에서 주체의 문제가 제기된다. 통섭의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하더라도 모든 분과학문들을 평등하게 인지하고 통섭을 진행할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사실 전무하다고 봐야 한다.
결국 자연과학자는 자연과학을 기본으로 하고 다른 학문을 끌어 들이는 방식이 용이하며, 인문학자는 인문학을 기본으로 할 수밖에 없다. 이건 불평등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능력의 문제에 불과하다. 물론 그 끌어 들이는 방식이 서구 특유의 이성만능주의와 과학만능주의에 근거한 것이라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질 테지만 말이다. 그건 뒤에서...
2. 인지적-경험적 이성 대 영성-초이성-직관
이것은 이성/감성의 문제처럼 잘 알려진 이분법이다. 그리고 사회과학자인 그는 서구의 과학에서 비롯된 이러한 인간의 인식체계에 대한 인위적 분리와 이성중심의 서열화를 깨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다지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이미 인류는 역사적으로 계몽주의와 과학만능의 시대를 거쳐왔고 그렇게 형성되고 유포된 가치관들이 실은 인간의 인식 지평을 협소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과학 스스로가 새롭게 증명하고 있는 상황이니까 말이다.
문제는 그 사회과학자가 열거한 영성. 초이성, 직관이란 것이 인간의 인지적, 경험적 이성과 무관한 것인가 하는 문제다. 솔직히 종교계에서 주로 인용되는 영성에 대해선 별로 언급하고 싶지 않다. 무엇인지도 잘 모르겠거니와 그것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사람도 본 적이 없을 뿐 아니라 심지어 그렇게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단정짓는 인간들만 보아왔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 테지만 굳이 찾아서 들어보고 싶진 않다.
그리고 앞서 말한 것처럼 초이성이란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잘 모르겠다. 다만 미술계에서 이 단어를 주로 사용하는 경우들로 한정지어 보자면 '초이성'이란 '직관'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의미를 갖고 있는 듯 하다. (설마 '서번트 신드롬'을 지칭하는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여기서 다시 한번 질문해보자. 초이성/직관은 인지적/경험적 이성과 무관한 인식체계일까? 그렇지도 않으며 그럴 수도 없다.
인간의 인지능력은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난 이후엔 무척 다양한 형태를 보이지만 그 과정은 사실 매우 단순하다. 그리고 그 과정은 인지적/경험적 이성이란 과정이다. 물론 인지적/경험적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도 존재한다. 그러나 그 현상들조차 '이해할 수 없음 혹은 어려움'이란 방식으로 인지할 수 있다. 그 목록안에 초이성과 직관이 들어있다. 결국 인지적/경험적 이성이란 과정을 거치지 못 한다면 초이성이나 직관 역시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게다가 언뜻 보기엔 초이성과 직관이 인지적/경험적 이성과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오히려 초이성과 직관은 인지적/경험적 이성의 반복적 사용으로 인해 축적된 결과물이 일정한 형태로 정형화한 것으로 파악하면 된다. 새로운 것을 인지하는 상황처럼 일일이 단계를 밟지 않아도 곧바로 알아 차릴 수 있는 수준을 지칭하는 것이라 보면 된다.
영성, 다분히 종교적인 의미의 영성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다만 초이성이나 직관과는 원인이 조금 다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인간의 인지체계는 사실 매우 단순하며 한계도 뚜렷하다. 영성의 경우엔 이성적인 판단의 축적물이 아니라 주로 의지의 축적물인 경우다. 말하자면 같은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떤 시각으로 바라볼 것인가 하는 선택적 의지의 문제이자 그 결과물이며 주로 종교적 의지를 의미한다.
그러나 무신론자이자 현실 종교의 상황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나로선 종교적 의지에 의해 형성된 영성에 부정적이다. 종교 역시 현실로부터 매우 큰 영향을 주고 받기 때문이다. 그러니 남조선처럼 정치적으로 과잉된 나라에선 현실 종교역시 그럴 수밖에 없고 그 결과 정치적으로 편향되고 사회적으로 왜곡된 경우 그런 죵교를 배경으로 형성된 영성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건 무신론자이자 종교에 비판적인 나의 견해지만.
3.
결과적으로 인간의 인지적/경험적 이성을 초이성/직관/영성과 분리시켜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방식이다. 물론 서구의 역사를 통해 보자면 그 책임은 다분히 종교, 특히 기독교의 책임이다. 과학의 태동기에 교리에 어긋난다며 가차없는 탄압을 일삼고 허황된 수사학을 구사했던 이들이 그들이니까.
반면 이 둘을 완전히 동등하고 개별적인 인식체계로 파악하는 것 역시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지나치게 종교적인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인간의 인지적/경험적 이성은 초이성/직관/영성뿐 아니라 모든 지각체계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인지적/경험적 이성이 절대 우위에 있다는 말은 아니다. 그건 전혀 다른 질문이고 결론만 말하자면 난 그 입장에도 동의할 수 없다.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술자리에서의 잡담이라면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지만 학문적인 접근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이 둘을 어떤 의미로든 완전히 분리된 개별적 존재로 인식하는 것은 사실 하등의 도움도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