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 소재에 대한 무책임
책임 소재에 대한 무책임
일본 대지진, 쓰나미 그리고 원전 사고까지 이어지고 있는 일본에 대한 국내 연예 스타들의 연이은 기부를 비롯한 국내의 각종 지원이 관심을 받고 있다. 엄청난 자연재해를 당한 국가에 대한 국제 사회의 지원이란 측면에서 보자면 이건 그렇게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게다가 어떻게 봐도 지리적으로 가장 인접한 국가라는 점을 고려하면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심을 받는 이유는 다 알다시피 양국간의 불행한 과거사 때문이다.
두번째 문제는 바로 책임 소재의 문제다. 어떤 사건이나 사고의 책임을 따지기 위해서 가장 신중해야할 것은 바로 그 문제가 발생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명확히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어떤 책임도 물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앞서 언급한 이들의 주장에 부합하는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물론 1차적인 책임은 일본에게 있다. 그러나 그 문제의 피해 당사자인 우리들은 그 문제에 대해서 책임을 다 했을까?
일제 30년에 대한 책임 문제를 한일 경제 협력이란 미명하에 돈받고 없는 일로 만들어 준 것은 다른 사람도 아닌 황군 장교 출신 다까끼 마사오, 일명 박정희다. 지금까지도 일본이 잘못은 사죄할 수 있지만 그에 대한 보상은 이미 이루어 졌다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어 준 것은 다른 사람도 아닌 대한민국의 대통령이었다. 게다가 일본군 위안부란 존재 자체가 창피한 일이라는 인식은 다른 이들도 아닌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바쳐 싸웠다는 광복회 늙은 이들의 생각이다. 그리고 우리들 역시 그 오랜 시간동안 일제 치하의 희생자들에 대해 침묵했다. 심지어 그런 이야기를 하면 빨갱이란 소리까지 들었던 시절도 있었다.
난 당신들이 왜 그들은 비난하지 않는지 안다. 왜냐하면 그들은 내부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내부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은 부끄러운 짓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저 없는 일인 것처럼 쉬쉬하려 드는 습성을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들의 그런 습성이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던 암흑같던 시절을 지탱해준 대중적인 인식이었다. 내부의 문제와 부조리, 부정에 대해선 침묵하면서 그 모든 책임을 외부로 돌리는 것에 혈안이 된 이중적인 작태에 대해선 난 동의해 줄 수 없다.
난 '자격'을 문제삼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건 일종의 억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혹은 자신이 속한 집단에 대한 자격의 문제를 이야기할 때는 엄격해져도 좋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 자세가 나와 내가 속한 집단의 발전을 부른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되묻건데 지금 우리가 과거 일본의 잘못을 물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보는가? 심지어 인류가 발명해낸 가장 위대한 발명품중의 하나인 <보편적 인권>이란 개념까지 거스르면서 말이다.
미안하지만 난 그럴 자격 없다고 본다. 자격이 없으니 아예 하지 말라는 말은 하지 못 하겠다. 그건 더 멍청한 짓이니까. 다만 하더라도 최소한의 예의라는 것은 갖추고 하라는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들 역시 때가 되고 능력 되면 일본으로 처들어가서 일본여자들을 위안부로 삼자고 떠들었던 내 고등학교 시절 국민윤리 선생님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짐승에 불과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