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는 필요없다.
드라마는 필요없다.
내가 최근 가장 인상깊게 보고 좋아하는 페덱스 광고에 나오는 문구다. 좀비가 점령한 도시, 생사의 기로에 선 그 순간 페덱스 사원이 물건을 배달온다. 사람들은 너무나 감사해 하지만 페덱스 사원은 그저 늘 하는 일이라는 어투다. 그렇다. 세상엔 드라마같은 일들이 많다고 하지만 실상 그 모든 드라마들은 그저 일상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우리가 영화 '도가니'를 통해 장애인들에 대한 비인간적인 성폭행을 '직접적으로' 목격하지 않았다면 인화학교 사건은 그저 늘 아침 신문에 보도되는 안 좋은 소식들중의 하나에 불과했을 것이다.
일상과 드라마가 분리되는 지점은 어떤 일상속의 사건이 다른 사건들에 비해서 너무나 드라마틱해서가 아니다. 단지 당신의 눈앞에 직접적으로 실감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뒤집어 말하면 직접적으로 실감나게 드러낼 능력이나 도구, 방법만 있다면 일상속의 모든 사건들이 모두 드라마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야기를 잘 만들고 드라마를 잘 구성해내는 사람은 바로 그런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인 것이다. 특이한 소재를 잘 발굴하는 사람이 아니라.
선거가 끝났다. 솔직히 내 예상보다는 나경원이 많은 득표를 했다. 살면서 자기가 네거티브 공격을 하는데 그 모든 네거티브 공격의 칼끝이 자기 목을 향해 다시 날아오는 경우는 살다살다 처음 봤고 그런 머저리같은 짓을 한 것 치곤 참 많은 득표를 한 셈이다. 아닌 척 하고 자기는 분명한 목표나 이상이 있어서 딴나라당을 찍는다곤 하지만 실제론 그런 것과 전혀 상관없이 맹목적으로 정치적 선택을 하는 이들이 아직도 꽤 많다는 의미다.
아무튼 선거는 끝났다. 무소속 후보가 시장이 되었다. 물론 범야권단일 후보지만 말이다. 사람들도 그렇고 언론들도 그렇고 이 새로운 정치적 사건에 대해 말들이 많다. 물론 그 와중에도 조선, 중앙, 동아같은 신문들의 논조는 '불안하다'는 뉘앙스를 최대한 풍기기 위해 무척 애들을 쓰고 있다. 한 편으론 맞는 말이다. 딴나라당 후보가 되었다면 모든 것이 확실하니까. 무상급식같은 건 각종 핑계를 대가며 차일피일 미룰 것이고 각종 재개발과 재건축 사업, PF사업을 통해 세입자들을 내쫗고 부동산 투기를 조장할 것이다. 그리고 각종 전시성 사업을 하느라고 서울시 재정을 들어먹을 것이다. 확실하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모든 것이 예측가능하고 따라서 전혀 불안할 것 없다. 그냥 없는 사람들은 '좆됐다'라고 마음 굳게 먹고 있으면 된다.
'확실한 파탄'과 '불안한 기대' 어느 것을 선택하겠는가? 이렇게 말하면 많은 사람들이 '불안한 기대'쪽 손을 들어줄 것이다. 그러나 말이 아니라 실제로 벌어지면 사람들은 정반대의 선택을 하는 경향들이 강하다. '불안하다'는 것만큼 두려운 것도 없고 또 두려운 만큼 사리판단을 하는데 엄청난 장애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화는 늘 불안할 수 밖에 없고 불안한 만큼 두려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피해갈 수 있지 않겠느냐는 헛소리는 하지 마라. 초딩만 지나도 그게 불가능한 소리라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니까.
불안한 기대? 미안하지만 그래서 난 전혀 불안하지 않다. 변화에 늘 따르는 것이 불안이고 그것은 너무나 정상적인 과정이다. 정상적인 일이 벌어지는데 불안해할 필요는 없으니까.
다만 그 지나친 기대는 하지 말라는 거다. 세상은 드라마가 아니다. 게다가 공상과학영화나 막장 드라마에나 나올법한 그런 드라마틱하고도 해피한 결말같은 건 일어나지 않는다. 드라마의 결말은 늘상 시청자들의 욕구에 야합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드라마들이 시청율에 목을 매는 한 그럴 수 밖에 없다. 드라마는 당신들이 그런 결말을 바라기 때문에 그런 결말을 보여주는 것일 뿐 실제로 그런 결말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번 서울 시장 선거는 많은 이들에게 선거와 투표라는 행위가 드라마로 다가오는 경험을 하게 해주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대통령이 되었던 사건만큼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건 어디까지나 당신과 나의 욕구에 의해 드라마가 된 것이라는 점이다. 그 욕구를 빼고 나면 단순한 일상일 뿐이다. 고로 드라마틱한 결론같은 걸 바라는 건 무리다. 그저 바랄 수 있는 걸 바라면 되고 사실 그것만으로도 이미 드라마틱한 반전의 계기는 이루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