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per+Media

배타적 권리

The Skeptic 2011. 12. 2. 17:30

배타적 권리

 

앞선 글에서 배타적 권리에 대해 언급한 바가 있는데 이 글은 그에 대한 글이다. 신분제 사회에선 신분 그 자체가 배타적 권리가 된다. 요즘같은 세상에선 이해하기 참 힘든 경우인데 어찌되었든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다'고 믿었던 시절인 셈이다. 물론 신분제 자체의 발생과정이란 것도 역추적해보면 압도적인 무력과 경제력을 보유한 이들이 자신들의 영화를 공고하게 만들기 위해 이런저런 것을 명분으로 내세우고 그 명분을 합당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지식인들을 동원한 과정임을 알 수 있다.

 

물질적 토대위에 상징적 질서가 만들어지는 것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때문에 물질적 조건들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사회구조의 변화를 불러오고 사후적으로 이 새로운 사회질서를 공고히 하기 위한 논리들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앨빈 토플러 류의 얄팍한 미래학이란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를 알 수 있다. 그들은 물질적 조건의 변화를 예측하지 못 한다. 단지 이미 주어진 물질적 조건하에서 근미래의 자잘한 변화들을 예측하는 것 뿐이다. 물론 개인적으론 그런 작업조차도 잘못된 경제학적 근거들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생각을 하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신분제가 붕괴된 사회의 배타적 권리는 어떨까? 신분제의 붕괴가 가져온 가장 큰 변화는 모든 종류의 지식과 기술에 대한 접근이 모두에게 개방된다는 사실이다. 즉 모든 종류의 지식과 기술이 개인의 노력을 통해 습득되는 순간 배타적 권리가 될 수 있다는 의미다. 실제로 우리는 대부분 그런 배타적 권리들을 보유한 개인들과의 관계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다만 인류의 과학기술의 눈부신 발전과 엄청난 분화로 인해 배타적 권리라기 보다는 배타적 권리들을 보유한 이들의 협력이 상호간에 그리고 전체집단에 더 유익한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점도 명백하다. 

 

그렇다고 이 모든 과정이나 절차들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알다시피 배타적 권리에도 특정한 사회의 속성에 따라 서열이 매겨지기 때문이다. 같은 노력을 들였다 하더라도 이런 사회적 서열화에 따라 그 가치는 매우 다르게 평가받는다. 이건 사실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단지 필요한 것이라면 일시적으로 저평가된 배타적 권리들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절차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류의 가치평가는 분명히 시간적으로 일시적으로 부각된 것들이고 시간의 경과에 따라 그 서열은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으며 개인이 아닌 집단의 차원에서 보자면 이런 가능성을 최대한 인정하고 유지하는 것이 훨씬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이런 배타적 권리를 승인해주는 절차다. 말하자면 일정한 노력을 들여 습득한 배타적 권리에 대해 '충분히 가치가 있음'을 승인해주는 절차로 예를 들면 각종 자격증같은 것이 그런 행위다. 문제는 이런 절차들이 특정한 계급이나 이해집단에 의해 독점되는 경우다. 말하자면 배타적인 권리가 되기 위한 과정을 독점하는 셈인데 이런 상황을 이용하여 특정 계급이나 이해집단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사회적 질서를 만들어 내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성향은 늘상 존재할 수 밖에 없는 것이고 실제로 이런 성향이 드러난다고 해서 모두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다. 문제가 되는 지점은 사적인 분야가 아니라 공적인 분야에서 벌어지는 경우다. 이를테면 행정, 사법, 정치와 같은 분야, 즉 과정만 놓고 보면로 개인적 노력을 통해 획득한 사적이고 배타적인 권리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 분야의 행위들은 집단에 속한 모든 개인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특수한 속성을 갖고 있다. 그래서 우리느 이런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에 대해 '공인'이란 호칭을 사용하고 일반인들보다 더 높은 수준의 도덕적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다.

 

글이 산만해졌지만 결론을 말하자면 신분제 사회가 아닌 곳에서 배타적 권리란 말그대로 배타적인 권리라기 보다는 배타적 권리를 갖고 있는 개인들간의 협력이 더 중요해졌다는 것이다. 

 

 

p.s.

확실히 일하는 짬짬이 글쓰려니 산만함을 피해갈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