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츄어리즘

박지성과 진보

The Skeptic 2012. 4. 20. 00:47

박지성과 진보

 

요즘 들어 재미있다고 느끼는 것중의 하나가 바로 남한의 진보는 박지성과 닮았다는 점이다. 걸핏하면 위기설이 튀어 나온다. 박지성이 EPL에 진출한 이래 단 1년도 위기설이 나돌지 않았던 적이 없었고 남한의 진보 세력 역시 마찬가지다. 거의 매년 위기설이 나오는데 우스운 건 그 내용도 거의 매년 대동소이하다는 점이다. 

 

EPL진출 초기 박지성은 과연 유럽의 빅리그에서 뛸 실력이 되는가라는 지적에 시달렸다. 시간이 흐르면서 맨유라는 팀의 특성에 맞는 선수라는 것이 증명된 후에는 엉뚱하게도 나이에 따른 체력 저하와 기량저하라는 위기설에 시달렸다. 남한의 진보 역시 마찬가지다. 정계 진출 초기엔 과연 진보가 대중적인 지지도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인가하는 회의론이 넘쳐났다. 정치판의 주류로 나서지는 못 했지만 적어도 정국을 주도하는 정책 생산능력이 있음을 증명한 이후에도 대중성에 대한 지적은 여전히 넘쳐난다.

 

박지성이 맨유에서 오랜 기간을 버틸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맨유라는 팀의 특성 때문이다. 맨유는 거의 매년 리그와 칼링컵이라는 FA대회, 챔피언스 리그라 불리는 전 유럽 클럽 대항 대회같은 제법 굵직굵직한 대회의 우승을 넘보는 팀이다. 리그와 칼링컵이 거의 축구시즌의 모든 목표인 중위권 팀들이나 오로지 리그만 바라보는 하위권 팀들과 차원이 다른 팀인 것이다. 당연히 다른 팀들에 비해 선수들이 주전급 선수들이 더 많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맨유의 특별한 시스템속에 박지성의 자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올 시즌처럼 챔피언스 리그도, 칼링컵도, 심지어 유로파 리그까지 떨어지고 오로지 리그만 남은 상황에선 그렇게 많은 주전급 선수 자체가 필요하지 않다. 당연히 박지성의 출전은 불투명해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다들 알다시피 우리는 당연한 현상을 일러 위기라고 부르지 않는다. 

 

남한의 진보 역시 마찬가지다. 꽤 오랜 기간동안 남한의 진보세력은 공식적인 정치의 장에 들어가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런데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늘상 지지율은 거의 제자리였다. 그리고 또 많은 이들이 이런 현상을 지적하며 '진보의 위기'라는 타이틀을 붙인다. 그런데 정작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놀고 봤을 때 진보 혹은 좌파가 정권을 가지고 있는 사례는 그다지 많지 않다. 그나마 상황이 나아진 것은 거의 남미의 연이은 좌파정권의 집권 때문인데 실상 그마저도 남미의 독재자들과 유착한 미국의 패권주의,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해 도입된 신자유주의의 폐단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진보 세력이 기성정치판에서 압도적인 힘을 갖지 못하는 건 그리 새로운 현상이 아니란 의미다. 

 

그런데 이번 총선을 보면서 알아 차린 사실이 있을 것이다. 한미 FTA와 제주도 강정마을 해군기지, 보편적 복지와 선별적 복지를 아우르는 복지 문제의 쟁점화, 재벌위주의 경제 지형 재편, 부의 편중 현상 해소와 같은 이슈들은 사실 진보세력이 주장하고 공론화한 것들이다. 그런데 예전같으면 기성 정치판이 거들떠도 보지 않을 이 이슈들이 선거의 판세를 가르는 중요한 정책들로 등장했다. 적어도 현실에 대한 판단과 정책생산력이란 면에서 보면 진보세력은 이제 가볍게 볼 수 없는 브레인 집단으로 받아 들여지기 시작한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기설은 또 반복된다. 

 

만약 박지성에게 맨유라는 팀에서 부동의 주전 자리를 차지할 것은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면 박지성 위기설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선거를 통해 진보세력이 압도적인 다수당이 되고 정치권력을 잡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면 진보 위기설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즉 박지성과 진보에 대한 위기설은 현실이 아닌 지나친 기대치에서 나오는 것일 뿐이다. 

 

늘 그래왔지만 우리들의 기대치와는 상관없이 박지성과 진보세력은 꽤 잘 해오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