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 갈망?
욕망? 갈망?
또 한 편의 영화가 화제속에서 상영을 시작한단다. 제목은 '은교'. 박범신의 소설이 원작이란다. 내 나이 서른이후로 소설을 읽고 가슴이 뛴다거나 설레였다거나 혹은 뒷통수를 두드려 맞는 듯한 느낌을 받은 적이 없어서 사실 그 이후로 소설은 전혀 읽지 않기 때문에 그 소설의 내용이 무언지는 잘 모르겠다. (우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아직도 죽기 전에 제대로 된 장편 소설 하나쯤은 써보고 싶다는 상상을 하며 산다) 단지 갈망을 소재로 한 연작 소설중의 하나라는 설명은 보았다.
그런데 또 썩 괜찮은 영화 하나가 변태스럽게 소모되는 현장을 보고 있기도 하다. 그 시작은 언론부터다. 이 영화에 대한 언론의 관심은 오로지 '파격적인 노출'이란 한 문장으로 정리된다. 그리고 그런 언론에 대해 그다지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지 못하며 심지어 그런 비판적인 시각이 왜 필요하느냐며 반문하는 사람들에게 영화 '은교'란 고작 성인인증을 받고 대형 스크린으로 볼 수 있는 에로영화에 불과할 뿐이다. 물론 그게 목적이라면 굳이 쌩돈내고 영화관엘 가는 것보다는 그냥 편하게 집구석에 처박혀서 인터넷 검색을 하는 게 더 빠르고 경제적일 것이다.
대체로 억누르는 것일 수록 그리고 숨기려고 드는 것일수록 그 모습은 변형되고 극단적인 되는 것이 보통이다.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서 욕망이니 갈망이니 하는 것들이 바로 그런 사례들이다. 대한민국에서 허용되는 욕망은 오로지 하나 '입신양명'에 대한 욕망, 하나뿐이다. 심지어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람답게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해야 한다는 공부조차도 오로지 '입신양명'의 도구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니 사람들은 정작 자신이 무엇을 원하며 살아가는 것인지 모른다. 아니 무엇을 욕망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조차 모른다. 당연히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선 어떤 것을 해야 하는가와 같은 구체적인 이야기들은 더더욱 모른다. 그래도 어찌어찌 입신양명에 성공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입신양명이 욕망이 무엇인지 그것을 얻기 위해선 어떤 방법을 선택해야 하는 지는 역시 가르쳐 주지 않는다. 단지 입신양명에 성공한 이들에겐 자신이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모르는 상황에서도 원하는 것을 아주 쉽게 얻을 수 있는 각종 수단들이 주어진다. 돈, 권력같은 것들 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런 수단들을 사용하는데 거리낌이 없다. 그렇게 과정들이 반복되고 그들에겐 그것이 당연한 일이 되버 버린다. 너무나 쉽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게 되는 일.
그렇게 '불가능'과 '한계'에 대한 감각이 무뎌진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갖고 있을 수 밖에 없는 '불가능'과 '한계'에 대한 감각이 무뎌진다는 건 불행하게도 그가 더 이상 인간의 모습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가지고 있는 수단이 무섭다거나 혹은 부러워서 그들 앞에서 솔직해지기를 거부한다. 당연히 그들은 그들 자신이 어떻게 변해가는지조차 모를 수 밖에 없다.
욕망과 갈망, 그리고 그 감정들이 안으로 품고 있는 불가능과 이루어질 수 없음에 대한 안타까움에 대해서 모른다는 건 그래서 불행한 거다. 물론 자신이 불행하다는 것을 모른다면 그건 불행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