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급과 연대
계급과 연대
나는 계급이란 표현을 사용할때 '노동자 계급'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적어도 내 판단엔 '계급'이란 개념은 어떤 특정한 형태를 가졌거나 혹은 특징적인 현상이나 활동을 공유하는 특정한 집단의 사람들에게만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만약 계급이 그렇게 정의할 수 있는 것이라면 계급혁명이란 표현은 지나친 표현이다. 혁명보다는 그저 특정 집단에 의한 권력 독점 현상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무난하며 역사적으로 볼때 그리 특별할 것 없는 일반적 현상이다.
때문에 나는 '노동계급'이란 표현을 사용한다. (물론 가끔 실수로 노동자계급이란 단어를 쓰는 경우도 있다만) 어떤 이의 현실적 위치가 아니라 어떤 계급적 지향을 갖고 있는가가 중요하다는 의미다. 이제는 꽤 오래되어 누구도 사용하기를 꺼리는 촌스러운 표현처럼 되어버린 '당파성'이란 단어가 계급의 속성을 설명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보는 이유기도 하다.
우리는 자본주의라는 현실에서 산다. 때문에 자신의 계급적 지향과는 상관없이 자본가인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물론 계급적 지향에 충실한 사람이라면 그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주장도 있을 수 있지만 그건 지나친 억측이다. 깨달음이란게 누구에게나 똑같은 시간에 찾아오는 것, 이를테면 누구나 나이 스무살이 되는 생일에 찾아오다든지 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이 하고 싶어하는 일이 계급적 지향에서 다소 어긋날 수도 있다. 그런 차이들을 가볍게 무시한다는 건 지나친 단순화를 넘어 비현실적이기까지 한 주장이다. 만약 그게 진실이라면 공지영은 소설을 쓰는 게 아니라 공장에서 미싱을 돌리고 있어야 하지 않겠나?
그런데 바로 이런 차이들이 공통된 계급적 지향을 갖고 있는 사람들사이에서도 파열음을 만들어 낸다. 당연하다. 자본주의 국가에선 노동자보다는 자본가 혹은 자본가에 가까운 지위를 가진 이들이 더 안정적이고 안전한 삶을 누릴 확률이 훨씬 높기 때문이다. 비록 계급적 지향이 동일하다고 하더라도 현실적 위치에서 발생하는 이런 차이들을 완전히 무시하기란 쉽지 않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때문에 발생하는 갈등 관계란 것은 정말 만만치 않다. 최근 이슈가 되는 '노-노 갈등' 역시 그런 차원의 문제이며 나아가 '만국의 노동자들이 단결하지 못 할수밖에 없는' 가장 큰 요인이기도 하다. 때문에 '연대'란 말이 진보진영 내부에서 가장 흔하게 쓰이는 단어중의 하나이면서도 정작 '제대로 된 연대'라는 것을 구경하기 힘든 이유이기도 하다. '네가 얼마나 잘 났다고 그런 지적질이냐? 너나 잘 해라'같은 경우다.
그런데 이건 계급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현상이 아니라 별 것도 아닌 일 가지고 죽일듯이 싸우는 빠순이, 빠돌이들의 수준낮은 팬덤질과 다를 바가 없다. 즉 계급적인 문제가 아니라 그냥 패거리 주의인 거다.
'너는 우리와 다른 사회적 위치에 있는 인간이다. 비록 네가 우리와 같은 계급적 지향을 갖고 있다고 하지만 우리의 사회적 위치에 대해서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 했다면 입 닥치고 있어라' 라는 말은 '애를 낳아보지 않았으면 출산의 고통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는 것과 다를바 없는 극단적 경험주의에 불과하며 이는 '직접 정치를 해보지 않았으면 정치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는 주장도 인정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들며 결과적으로 대중정치와 민주주의를 부정하게 만든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진보임을 자처하는 이들이 이런 류의 주장을 펼치면 안 되는 이유다.
우리들 대부분은 자신과 다른 처지에 처한 이들의 삶과 그 삶으로부터 오는 각종 고난과 고통들에 대해서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가 연대를 말할때 기본적으로 전제해야할 것이 이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삶에 대해 불완전한 이해를 할 수 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연대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