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먹고 바람똥

또 하나의 사실.

The Skeptic 2012. 12. 20. 18:50

남한의 건국 연도는 공식적으로 1948년이다. 물론 일제 강점기하에서 강탈당한 주권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도 우리의 역사라고 한다면 건국연도는 임시정부 수립일인 1919년이라고 볼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그것이 조금 더 일리가 있다고 보는 편이지만 어쨌거나 공식적인 건국연도는 1948년이다. 그 이후로 많은 사건사고들이 있었다. 그것도 다른 나라들과 비교하면 무척이나 짧은 시간에 말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 내용이 어찌 되었든 형식적인 면에선 민주주의가 구현되는 나라다. 그 전, 그러니까 약 60년쯤 전엔 부정투표, 그러니까 불법적인 선거운동 수준이 아니라 투표에서 불법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되는 나라였다. 그리고 그 시기를 조금 지난 이후에는 체육관에 사람들, 그래봐야 이미 누굴 선출할지 정해진 사람들 모아다 놓고 대통령을 뽑기도 했고 심지어 군바리들이 민간 정부를 폭력으로 전복시키고 정권을 강탈해가기도 했던 나라다. 


그런 나라가 이젠 선거운동의 부정이나 불법은 몰라도 적어도 투표 과정에 관한 한 불법이나 부정이 개입하기 힘든 나라가 되었다. 개개인의 기억만으론 이 과정을 다 이해하거나 실감하긴 힘들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이 모든 것을 기록하고 있다. 약 60년쯤 되는 시간동안 이 모든 과정이 이루어졌다는 말이다. 누가 뭐래도 이건 상당한 발전인 건 사실이다. 비록 인식론적인 차원에선 아직도 성인남성 위주의 가부장제가 위세를 떨치고 있고 근대적 이성에 입각한 과학적 사고방식보다는 무조건적인 믿음을 강요하는 중세시대와 같은 종교적 광신이 더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 역사에서 더 재미있는 사실은 그 60년이 넘는 기간동안 최소한의 수준에서 보수적인 대통령이라고 부를만한 이가 고작 두 명뿐이라는 점이다. 주지하다시피 그 둘은 김대중과 노무현 대통령이다. 그러니까 60년이 넘는 기간동안 고작 10년, 그것도 진보적이라거나 좌파적인 대통령이 아닌 보수적이고 우파적인 대통령이 집권한 고작 10년인 것이다. 그런데도 남한이라는 나라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내용적인 면에선 몰라도 적어도 형식적인 면에선 민주주의라는 틀을 갖추었다는 것이다. 


물론 대통령 선거라는 것이 시작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지나온 과거에 대한 평가인지를 묻는다면 난 후자가 더 적절하다는 답을 내놓을 것이기 때문에 그 두명의 보수-우파 대통령의 출현조차도 남한 역사 발전의 중간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알다시피 특정한 정치세력이 공인된 권력을 갖고 무언가를 하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의 차이는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에 권력의 유무가 전혀 무의미하다고 말할 순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60년이 넘는 기간동안 고작 10년, 그것도 보수-우파 대통령의 집권이란 기간만으로 남한 민주주의 발전의 역사를 설명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비록 형식적인 차원의 민주주의일지언정 그것을 이루기 위한 과정과 노력은 사실 국가권력과는 무관한 형태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더 합당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그 노력의 최종 목표중에 국가권력이 포함되지 않는다는 건 아니다. 단지 그간의 발전이 국가권력의 지원없이 이루어졌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건 그동안 내가 자주 언급한 것, 즉 남한 진보가 언제 국가나 그에 준하는 권력의 보호를 받으며 성장해온 적이 있는가라고 묻는 것과 같은 의미다. 물론 정상적인 민주주의 국가라면 남한의 여러 진보세력들과 좌파들도 국가의 보호와 지원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강조하다시피 남한은 인식론적인 차원에서 여전히 합리적 이성보다는 종교적 광신이 더 대세를 이루는 나라인지라 이런 기초적인 민주주의조차도 언제 받아 들여질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역시 중요한 것은 그런 것 없이도 남한의 진보세력과 좌파들은 성장해왔다는 것이다. 


내가 굳이 이런 케케묵은 이야기를 다시 한번 하는 이유는 선거가 끝나고 난 이후에 주변에서 실망스럽다는 반응들이 너무 나와서 그러는 거다. 물론 프로야구 경기에서도 내가 응원하는 팀이 지면 실망스러운데 하물며 투표인데 오죽하겠는가. 그러나 적어도 남한의 역사가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실에 의거하자면 선거 결과에 그리 실망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