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
인간은 동물과 다르다. 개인적으론 그 증거를 합리적 이성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강한 편이지만 그렇다고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중요한 요소로 감정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어느 면에 더 방점을 찍는가의 차이일 뿐이다. 단지 정권교체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인데 벌써 5명의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죄박이가 집권하는 지난 5년간의 나날들이 사회적 약자인 그들에게 얼마나 모진 세월이었는가를 증명하는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심지어 이 땅의 노동자들은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의 집권을 통해 이제 경험으로 안다. 어설픈 보수정권이 등장한다고 해서 자신들의 삶이 크게 나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보수정권으로의 정권교체조차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이 그들을 절망으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극단적 신자유주의는 사람들의 삶과 영혼을 이렇게 황폐화시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불안을 먹으며 유지된다. 공동체의 존재와 그로 인해 안전하고 안정된 삶이 가능하다는 가능성을 무너뜨리고 경쟁을 통한 차별이란 질서를 내세움으로서 사람들은 언제든 자신이 경쟁에서 도태될 수 있다는 심리적 불안감을 갖도록 만드는 것이다. 거기에 극단적 신자유주의는 그런 질서가 고착화되고 심화되도록 만든다. 한 번 도태되면 더 이상 회복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는 단순하고 막연한 불안감을 넘어 절망으로 이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는 그런 것이다. 불행한 일은 사람들의 주장처럼 극단적 신자유주의라는 것을 배제할 수 있는 마땅한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꽤 많은 사람들이 '양극화 해소', '복지 확대'를 통해 신자유주의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정작 신자유주의라는 것이 어떻게 도래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선 종종 잊어 버린다.
자본주의는 이윤을 목적으로 움직이는 경제 시스템이다. 어떤 식으로든 이윤을 창출해내고 그것을 축적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런 자본주의가 걸어온 길은 공적인 영역을 무너뜨리고 그 공적인 영역을 사적인 영역으로 만들어 내는 과정이었다. 공교육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경쟁의 격화는 사교육 시장의 거대화를 불렀다. 단지 같은 마을에 사는 이웃이란 이유만으로 각종 경조사를 서로 챙기던 사회에서 이젠 그 모든 경조사를 위해 보험과 상조서비스에 가입해서 돈을 지불해야만 하는 시대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극단적 신자유주의는 바로 그런 과정을 거쳐 도래한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은 일들, 공적인 영역을 하물어 사적인 영역으로 만들고 그것을 다시 이윤추구의 도구로 삼는 과정들의 축적을 통해 도래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 신자유주의가 목표로 삼는 것은 단순히 공적인 영역이 아니라 공적인 영역을 규정하고 보호 혹은 보증하는 역할을 하는 국가다. 죄박이 정권 들어 각종 공공 서비스, 그러니까 철도, 상수도, 공항, 공교육, 의료와 같은 분야에서 민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줄기차게 흘러 나온 것이 그런 이유에서다. 참으로 우습게도 남한의 멍청한 인간들은 스스로 국가의 책무를 떠맡을 의사가 전혀 없는, 심지어 자신들의 손으로 국가라는 조직을 무너뜨리고자 하는 이들에게 국가를 허물고 그 자리에 자본이 작동할 수 있도록 만들라고 국가의 권력을 넘겨주었던 것이다.
아무튼 극단적 신자유주의는 그런 과정을 통해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된 것이다. 결국 단순히 극단적 신자유주의가 갖고 있는 몇 가지 특성들을 제거하는 것만으로 제동을 걸기란 사실 매우 난망한 일이다. 설령 그걸 성공시킨다고 하더라도 자본주의 질서가 살아있고 여전히 그 목표가 최대 이윤추구라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 하는 한 자본주의는 언제고 극단적 신자유주의를 다시 불러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불행한 것은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고개를 끄덕거리는 사람들도 자본주의 질서를 무너뜨리든지 아니면 새롭게 정의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면 고개를 갸웃거린다는 점이다. 물론 이해할 수 있다.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경제 질서라는 것을 상상하는 일조차 이젠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닌 세상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자본주의를 버리든 아니면 자본주의를 아예 새롭게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복지 정책 확대'나 '양극화 해소'같은 방법은 궁극적인 대책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스스로 국가를 포기하려는 국가권력에 의해 추진된 극단적 신자유주의의 폐해로 인해 당장 그런 정책들이 필요하다는 점, 그리고 이런 말을 해봐야 단 한 글자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빨갱이'라고 입에 개거품을 물 이들이 전체 국민 75% 중 무려 51%나 된다는 객관적 사실을 보면 사실상 궁극적인 대책같은 건 이루어질 가능성이 전무하다고 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래서 늘 현실은 최선이 안 된다면 차선을, 최악을 피하기 위해 차악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러니 절망하지 말라는 거다. 산이 높으면 골이깊다고 했다. 기대나 희망이 크면 그만큼 절망도 큰 법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말한 것처럼 가야할 길은 아직도 너무나 멀다. 게다가 객관적인 여건역시 별 도움이 안 된다. 노인층 중 절반이 빈곤에 시달린다면서도 그들을 빈곤층으로 몰아넣은 이들에게 자신의 권력은 양도해준다. 이것이 지금 현재 우리가 처한 객관적 여건이다. 게다가 그 길을 가는 도중에 또 어떤 변수가 발생할지 아무도 모른다. 당장 눈앞의 일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여정의 끝은 아니다.
p.s.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를 지적하고 그 때문에 자본주의를 부정하거나 혹은 완전히 새로운 자본주의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선생님이 외우라니까 처외우는 것만 할 줄 아는 단세포들이 세상엔 자본주의 아니면 사회주의 밖에 없다는 아메바스러운 흑백논리를 펴는 것이다. 물론 남한엔 그런 인간들이 전체 국민들 75%중 무려 51%나 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