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먹고 바람똥

신념에 대하여

The Skeptic 2013. 1. 8. 16:48

난 안 그런데 아직도 주변엔 대선후유증을 앓는 이들이 있다. 그나마 상당수는 그래도 좌절, 실망같은 단계를 지나 냉소라는 다소 긍정적인(?) 수준으로 넘어왔는데 아직도 그 단계조차 못 밟은 이들도 있다. 그래서 해보는 이야기다. 신념 혹은 신뢰에 대한 이야기.


늘 그렇지만 신뢰와 믿음이란 건 '그래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마음가짐을 가지거나 혹은 유지하는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나도 수긍하는 편이고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말한다. 그런데 엄밀하게 말하자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믿음이나 신뢰 혹은 신념같은 것은 '그래서'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두 가지 측면을 모두 갖고 있다. 즉 상황과 경우에 따라 두 가지중 한 쪽에 무게감이 실리는 것 뿐이다. 


이런 거다. 기업에선 일 못하는 직원은 잘라도 된다. 그가 잘리고 나서 무얼 해먹고 살던 말던 기업은 신경쓸 바가 아니다. 그러나 국가는 일 못 한다고 국민을 자를 순 없다. 국가를 기업처럼 운영하면 절대로 안 되는 이유다. 고부갈등이 있다. 일반적으로 고부갈등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남녀평등과 관련된 문제다. 시어머니는 과거 성인남성 위주의 가부장제적 가치관을 받아들이는 편이다. 물론 그 가치관은 자신의 사회적 위치에서 보자면 아주 불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맹신한다. 반면 며느리들은 그 질서자체가 부당하고 불합리하기 때문에 거부하려고 한다. 여기서부터 고부갈등은 시작된다. 


이 경우를 '그래서'의 시각에서 보자면 거의 대부분의 경우 잘못은 시어머니가 저지른다고 봐야 한다. 적어도 남여평등에 관한한 과거와 같은 성인남성 중심의 가부장제를 자랑스럽게 들먹일 수 있는 단계는 어느 정도 벗어났기 때문이다. 물론 그래도 아직은 여성의 사회적 역할이 커졌기 때문에 그런 변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지만 말이다. 이런 시각은 사회적 역할의 배분이란 문제가 남녀평등이란 가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잘못된 기능주의적 발상이다. 그러니까 며느리들중 일부는 남자들과 똑같이 밖에 나가서 돈을 벌어오니 이런 여성들에겐 남녀평등이란 가치가 통용되어야 한다는 식인데 이는 사실 기업이 쓸모있는 직원과 쓸모없는 직원을 가르는 시각과 그리 다르지 않다. 이런 치명적인 약점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남한의 대다수의 남성들은 남녀평등이란 가치 자체를 단지 이런 기능주의적 차원에서만 이해하고 있다. 즉 자신이 대단한 남녀평등주의자인 척 하는 남자들의 대다수는 여전히 남여평등이란 일반적으로 우월한 남성들이 일부 특별한 여성들에게 나누어주는 시혜적 특권이라고 여기는 거다. 같잖게도 말이다. 


이렇듯 '그래서'의 시각에서 보자면 문제의 시시비비는 쉽게 가려진다. 그런데 여기서 고부갈등의 당사자는 시어머니와 며느리다. 어떤 식으로든 이들과 가족이란 울타리로 묶인 이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래서'의 시각으로 시시비비를 가리고 '기업'의 시각으로 상벌을 내리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불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잘잘못을 가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그것을 칼로 무베듯이 딱 잘라 말하지 않으며 나아가 방법적인 차원에서 '국가'처럼 양 당사자를 모두 다독여가며 문제를 해결할 수 밖에 없는 거다. 


즉 문제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에 관한 한 '그래서'와 '기업'의 시각이 더 효용성이 있지만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선 '그럼에도 불구하고'와 '국가'의 시각이 더 좋다, 아니 개인적인 시각으로 보자면 방법은 오로지 그 한 가지밖에 없다. 문제는 내가 이것은 임의로 두 가지 다른 시각인 양 거론했지만 실제론 하나처럼 움직이는 것이란 점이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이 두 가지중 한 가지만 가지고 무언가를 판단하고 실행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거나 혹은 실패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특히 전자 '그래서'와 '기업'이란 시각만 갖고 세상을 바라보면 미안하지만 세상은 온통 실망과 좌벌, 배신으로 가득찬 곳일 수 밖에 없다. 단순히 이번 대선 결과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러니 차분하게 생각해볼 일이다. 내가 혹여 위에 언급한 두 가지중 한 가지를 결여한 채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p.s.

사실 나라고 그동안 그런 시각을 피력하지 않았던 바는 아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불특정 다수 혹은 지극히 개인적인 글쓰기라는 방법에만 한정적으로 사용한다. 사람과 얼굴 마주 하고 앉은 자리에선 그런 짓 하지 않는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대상과의 자리에서 그런 구름먹고 바람똥 싸는 소리라는 건 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종교처럼 근거없는 믿음을 전파하겠노라고 마음먹은 이들이 아니라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