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먹고 바람똥

'없다'의 두 가지 의미.

The Skeptic 2013. 4. 2. 14:10

언어의 쓰임새라는 것이 다 그렇듯이 모든 단어는 그 자체로 명확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즉 주변의 단어들과의 관계속에서 의미를 얻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없다'라는 단어도 마찬가지다. 


"정치적인 의도는 없었다"


이 문장이 담고 있는 의미는 단순히 '아무 것도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부정', 즉 '그것이 아니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고 이 문장이 재미있는 것은 이 문장을 사용하는 이들이 '그것'의 의미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즉 '그것의 의미는 알고 있지만 그런 의미로 사용한 것은 아니다'라는 다소 이해하기 힘든 의미가 되는 것이다. 


욱일승천기에 나찌의 경례를 모방한 사진을 제작한 학생들도 그런 말을 사용했다. 반성의 의미이고 그에 합당할 만한 행위들도 했지만 여전히 부정적인 여운이 남는다. 즉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그 사진을 제작한 학생들은 그 사진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진을 만들었다는 것, 그게 진짜 문제인 거다. 


톨레랑스의 나라라고 알려진 프랑스에도 극우 파시스트들은 존재한다. 심지어 그들은 국민전선이란 정치적 결사체까지 가지고 있으며 최근의 경기침체로 인한 사회 분위기 탓에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마저 얻고 있는 실정이다. 그들은 국가주의를 전면에 내세운 사실상의 인종차별주의까지 주장하고 있는데 이건 과거 나치의 주장과 전혀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자신들을 나치와 결부시키는 것이 대해서 한사코 거부한다. 비록 나치와 똑같은 주장을 하더라도 직접적으로 나치와 관련이 있다고 말할 순 없는 것, 그것이 바로 유럽에서 나치와 파시즘이 처한 위치다. 


게다가 최근에 벌어진 사건 하나, 어떤 종합격투기 선수가 욱일승천기가 새겨진 가라데 도복을 입고 경기에 등장했다가 우리 나라 파이터인 정찬성과 네티즌의 항의를 받았다. 그 선수는 그런 의미가 있는 줄 몰랐으며 전혀 고의가 아니었다고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그리고 해당 도복을 제작한 업체에서도 사과와 함께 도복의 공급을 중단하겠다고 공식적으로 표명했다. 재미있는 건 그 선수가 2차 세계대전과 거의 아무 상관도 없는 캐나다 출신이란 것, 심지어 도복 제작업체는 일본 업체라는 것이다. 뒷 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공식적으로나 대외적으로 욱일승천기가 담고 있는 의미 역시 나치의 그것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심각한 부정적 의미를 담고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런데 그 파시즘의 직접적 피해국가인 나라에서 그 상징물의 정치적 의미를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경각심없이 그것을 사용했다는 것이 과연 무얼 의미하는 걸까. 그냥 그 학생들의 정신나간 짓을 비난해버리면 문제는 아주 간단해진다. 그런데 그냥 그렇게 치부해버리기엔 무언가 많이 찝찝하다. 안 그래도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통상적이고 정상적인 수준을 넘어선 나라에서 왜 이런 모순적인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진짜 문제는 이 질문에 있는 것이다. 


답은 매우 단순하다. 일반적인 남한의 국민들은 일본을 싫어한다. 그런데 정작 일본을 싫어하는 이유는 명확치 않다는 것이다. '왜 일본을 싫어하느냐'라고 물으면 과거 일본이 저지른 극우 파시즘적 행태때문이라고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될까. 난 별로 없을 거라고 본다. 일본이 저지른 만행들을 부분적인 예로 들면서 설명할 수도 있을 테지만 그것이 어떤 정치적 사상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지는 제대로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똑같은 정치적 사상적 배경을 갖고 있지만 그 행위의 주체가 다르거나 혹은 드러나는 형태가 달라지면 그것이 무엇인지 인식하지 못 하는 것이다. 때문에 친일부역자이자 군사 쿠데타라는 국가 반역죄를 통해 정권을 찬탈한 극우 파시스트 독재자를 지금도 찬양하는 정신나간 짓거리를 하는 것이며 자국의 군대를 동원해 자국민을 살해하도록 만든 독재자가 여전히 국가의 비호아래 대대손손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이들이 갑자기 극우 파시즘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제대로 갖추는 것이 가능할까. 파시즘에 대한 교육이 그토록 잘 되어 있다는 유럽에서조차도 극우 파시스들이 존재하는 것이 현실인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