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츄어리즘

기록잔치?

The Skeptic 2013. 5. 9. 00:14

기록잔치가 벌어졌단다. 먼저 베어스, 1회에 선발 타자 9명이 모두 득점에 성공한 것도 희귀한 기록인데 그보다 더 멋진 기록이 나왔으니 바로 최다점수차 역전승이란다. 무려 11-1이라는 점수, 즉 와이번스가 무려 10점차를 뒤집고 역전승에 성공한 것은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단 한번도 나온 적이 없는 새로운 기록이란다. 그래서 기록잔치란다. 


언론에선 기적을 말한다. 그런데 정작 경기를 들여다 본 내 반응은 '기적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다. 이 경기를 들여다 보는 동안 기분이 좋았다거나 혹은 즐거웠던 것은 딱 1회뿐이었다. 당연하지 않은가? 내가 응원하는 팀이 1회부터 무려 9점이란 점수를 내고 있는데 안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물론 1최에도 5점이 넘는 점수를 얻기 시작한 순간부터 슬슬 이상한 느낌이 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만약에 이 경기가 몇 년 전쯤의 트윈스 대 자이언츠의 경기였다면 오히려 기대를 했을지 모른다. 그러니까 남한 프로야구팬들의 영원한 떡밥인 엘꼴라시꼬가 벌어진다는 의미기 때문이다. 이미 많은 이들에게 잘 알려진 바대로 '경기력은 천하무적 야구단 수준인데 긴장감은 WBC결승감'이라는 바로 그 전설의 경기들 말이다. 대체로 이런 경기는 너무나 한심해서 하품이 나오게 마련이지만 엘지 트윈스와 롯데 자이언츠라는 두 개의 고유명사가 붙으면서 일종의 브랜드화가 되어버렸고 명승부와는 또 다른 의미의 기대감을 갖게 만들었다. 


사실 기록이 나왔다는 측면을 빼고 본다면 대관절 이 경기의 어떤 점이 명승부고 기적이란 걸까? (영원한 떡밥인 엘꼴라시꼬도 기록이라면 뒤지지 않는다) 와이번스의 불굴의 의지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라는 야구 명언의 증명? 누군가는 그렇게 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내 눈엔 그냥 짝퉁 엘꼴라시꼬였다. 트윈스와 자이언츠라면 다른 의미에서 기대감이라도 있었을지 모른다. 브랜드고 브랜드에 대한 기대감이란 게 있으니까. 그런데 그런 팀들도 아닌 팀들이 이런 경기를 하면 그냥 실망스럽다. 


13-12 점수, 안타수 15-14, 사구 숫자가 8-10.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양 팀 투수들이 탈탈 털린 경기라는 말이다.(그나마 돋보인 와이번스의 백인식은 제외할 수 있지만 사실 이런 경기에서 나름 선방했다는 건 별 의미가 없다. 그러니까 외눈박이 마을에 눈 두개달린 사람이 나타난 것과 같은 상황인 거다. 정상은 정상인데 정상이라고 보기 애매한 그런 경우) 타격전도 타격전 나름이다. 이건 타격전이 아니라 그냥 투수가 아니라 피칭머신 세워놓고 경기한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리그 순위가 하위권인 팀들이라면 그래도 좀 이해가 된다. 리그 하위권인 팀의 특징은 선수구성에서 치명적인 약점이 있거나 혹은 선수 자체가 없다는 분명한 약점들이 있기 때문에 이런 경기들이 수시로 등장할 수 있다. 그런데 명색이 당대 최고 구단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 두 팀이 이런 경기를 한다는 건 실망이다. 


많은 점수 차이로 이기고 있어서 안일해진 베어스는 그렇다 치더라도 와이번스는 어떨까? 언론에선 포기하지 않는 와이번스라고 하고 결과적으론 그렇게 되기도 했지만 글쎄다. 경기 중후반 교체선수들을 보면 와이번스 이만수 감독도 어떻게든 이 경기를 뒤집겠다는 엄청난 의지를 보인 것 같진 않더라. 그냥 결과가 그렇게 되었던 것 뿐이지. 노력도 없고 그래서 운도 없었던 팀과 어쩌다 얻어 걸려서 이긴 팀. 이게 기록뒤의 실체다. 


물론 어느 시즌이고 이런 경기 한 두개 없는 시즌은 없다. 장기 레이스를 하다보면 제 아무리 강팀이라도 전력에 누수가 발생할 확률은 언제나 있고 바로 그 때 이런 경기들이 나오는 것이니까. 그런데 또 그런 상황에서도 그런 경기를 하지 않는 것이 강팀의 요건이다. 이길 경기는 확실하게 이기고 지더라도 맥없이 무너지지 않는 것. 그리고 그런 경기들이 재미있는 것이다. 



P.S. 

개인적으로 이런 경기들을 볼 때마다 김성근 감독이 그립다. 승부에 지나치게 집착한다는 평가를 듣기도 하지만 사실 그게 감독이 할 일 아니던가. 베어스의 김진욱 감독이 최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5월은 버티기'라고. 선발진과 불펜 모두에서 구멍이 뜷린 상황이니 당연한 말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버티기'라는 게 대체 무슨 의미일까? 난 '이길 경기는 확실히 이기고 가야 한다'는 걸로 알고 있다. '설마 10점차인데 지겠어'라고 생각했을까? 그럴 수도 있고 사실 야구장에 있는 사람들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단 한 사람, 감독은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