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망신과 김지하.
"日新日日新又日新"
한자를 사용하는 걸 그다지 즐기는 편이 아닌데 어쩔 수 없다. 말 그대로 '하루하루 새롭고 또 새롭게 하라'는 의미다. 즉 나태해지지 말라는 의미다. 주로 자기 수련을 열심히 하라는 의미로 자주 사용되는 말인데 사실 그런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상이란 건 얼핏 보면 매일매일이 거의 똑같은 하루처럼 보인다. 그러나 알다시피 그런 일은 영화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단 하루도 어제와 같은 날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단지 하루라는 시간 단위로 바라보면 그 변화라는 게 그렇게 눈에 띄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그런 시간들이 쌓이다 보면 큰 변화가 이루지게 마련이다.
물론 세상이 변하거나 말거나 여전히 과거의 시간에서 살고 있는 인간들도 있긴 하다. 사실 그런 인간들일수록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할 말인데 불행하게도 그 인간들이 그 사실을 안다면 지금 그렇게 살고 있진 않을 것이다. 그래서 무지와 나태를 자랑으로 아는 경우사람은 구제할 방법이 없다는 거다.
그런 거다. 내가 하루하루 새로워지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나를 둘러싼 주변 환경들은 나날이 달라지고 있다. '80년대엔 상상도 못할 차림'이라며 옷차림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불학무식한 시각을 보여준 인간도 있다만 정작 그 인간이 보여준 가장 핵심적인 불학무식은 지금이 80년대가 아니라는 것, 그 때와는 정말 많은 것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과거에 갇혀 살고 있다는 것이다. 병리학적으로 시간이 과거에 멈추는 증상도 있지만 그런 경우가 아니라 이런 경우는 그냥 불학무식한 거다.
자칭 타칭 민주화 인사임에도 불구하고 저번 대선에서 박그네를 지지한다는 소리를 했던 김지하란 인간이 있다. 박그네가 윤창중이를 대변인으로 임명할 때도 '잘 했다'고 했었다. 그 윤창중이가 최근에 성폭력이란 사고를 치니까 '국가의식'이 부족해서란 소리를 했다.
세상은 변화한다. 내가 그 변화를 인지하든 말든 그 변화를 받아들이든 말든 개의치 않고 말이다. 김지하가 살았던 시절, 그러니까 자칭 민주화 운동이 대세였던 시절엔 국가주의가 그 저변에 깔려 있었다. 민주화란 것도 결국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의미다. 그리고 그런 국가주의 덕에 민주화 운동이 나름 대중성을 얻을 수 있었다는 걸 부인할 순 없다.
그런데 그 이후 세상은 변화했다. 아니 변화했다기 보다는 민주화를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더욱 명확해진 것이다. 민주화란 단순히 나라를 사랑하거나 나라에 무조건 충성하라는 전근대적 봉건주의적 가치관 때문이 아니라 사랑할만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필요했던 것이다. 승자독식의 구조때문에 경쟁에서 뒤처진 이들을 사지에 몰아넣는 일이 일어나지 않고 남들과 다른 정치적 지향, 성적 지향을 갖고 있다고 해서 차별당하지 않으며 단지 어쩌다 보니 고추달고 태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각종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 그런 자랑스러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 필요했던 것이 민주화 운동의 궁극적인 목적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정작 당시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노라고 모가지에 힘을 주는 늙다리들중 일부는 이런 사실을 인지하지 못 한다. 그들에게 민주화 운동이란 단순히 무조건 나라에 충성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때문에 그 시절 나름 유명했다는 인사들이 최근 들어 헛지랄들을 하시는 거다. 김지하도 그런 인간인 거다. 성폭력이란 명백히 인권과 관련된 일인데 그걸 국가의식의 문제라고 치부해 버리는 게 그런 이유에서다. 그런 식으로 김지하는 과거 자신이 타도하자고 외쳤던 군사독재 정권의 후계자들과 인식적인 차원에서 아무런 차별성도 갖지 못한 인간이 된 것이다.
문제는 이게 더 이상 색다른 경험이 아니란 거다. 항일독립운동을 했다는 이들이 종군위안부 기념관을 자신들의 기념관과 함께 짓겠다는 말에 미친 듯 반대햇던 것도 그런 이유다. 그들은 나라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이란 지극히 봉건주의적이고 전근대적인 사고엔 익숙할지언정 전쟁상황에서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은 여성들이란 약자에 대해선 아무런 죄책감이나 동질감을 느끼지 못 하는 것이다. 게다가 나라에 자랑거리가 될만한 일인 독립운동은 기념할만 하지만 나라의 망신거리에 속하는 종군위안부 문제는 기념할 것이 아니라 감춰야 하는 치부정도로 여기는 거다.
대저 남한이란 나라에서 말하는 국가주의, 애국심이란 것의 수준이 이 정도다. 심지어 그걸 아직도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들도 많다.
일본의 극우파들은 일본이 두 번의 원자폭탄 공격을 당한 것을 대대적으로 추모하고 기념한다. 그러나 자신들이 2차 세계대전이란 전쟁을 일으킨 전쟁범죄국가라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고 감춘다. 왜? 그들도 일본이란 나라에 대해 무조건적인 충성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반문해보자. 남한의 자칭 애국자들과 일본의 극우파들이 과연 무슨 차이가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