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의 차.
1.
오늘 국회앞에서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이 시민들이 보내준 자동차 부품으로 완성차를 만들고 그것을 선보이는 행사가 있었단다. 별 것 아닌 행사같지만 이 행사가 보여주는 의미는 남다르다.
남한에 사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노동자다. 그런데 그 노동자들중 상당수는 다른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면 '빨갱이'라고 욕을 한다. 그 시각엔 노동자와 노동자의 권리, 그것도 법치주의 국가에서 법으로 보장한 권리에 대한 무시내지는 냉소가 숨어 있다. 그들이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난 아직도 잘 모른다. 자기는 그런 하찮은 노동자따위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지, 지금은 노동자지만 조만간 엄청난 신분상승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 것인지 아니면 국가와 기업을 위해서 노동자따위의 삶은 무시당해도 괜찮다고 여기는 건지 잘 모르겠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것이 어떤 이유이든 이해할 수가 없다.
아무튼 그렇게 이해하기 힘든 이유로 남한의 노동자들중 상당수는 자신의 권리같은 건 무시당해도 괜찮다고 여기고 있으며 나아가 다른 노동자들에게도 그런 삶을 살라고 강요하는 중이다. 그렇기 때문에 파업을 하고 단체협약을 요구하는 노조와 노조원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세상을 허물려고 드는 악의 무리들 쯤 되는 걸로 여기는 거다.
그런데 노조와 노조원들은 그런 걸 요구하지 않는다. 심지어 과거처럼 자신들이 열심히 일한 만큼의 댓가나 혹은 최소한의 인간적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사회적 임금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과거 쌍용차 노동자들의 싸움부터 오늘 벌어진 완성차 행사까지 이들이 요구한 것은 그저 공장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 뿐이었다.
미국에선 월가 점령 시위가 대단한 이슈를 만들어 냈다. 월가를 점령한 그들의 요구중 가장 중요한 사안중의 하나는 바로 금융 위기를 자초한 사람들이 여전히 막대한 성과급과 보너스를 챙겨가는 것에 대한 반대였다. 그들이 자초한 금융 위기는 많은 이들의 평범한 삶을 뭉개 버렸다. 그런데 정작 그 사건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이들은 아무런 문제없이 그냥 돈만 잘 벌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권리는 넘쳐나는데 책임은 지지않는 상황, 월가를 점령한 이들이 분노한 이유다.
쌍용자동차 문제는 갑작스레 밀려 들어오는 바람에 모두가 무방비 상태에서 당하고 만 신자유주의적 경제 정책과 그에 편승하여 이윤만을 쫗은 경영진이 만들어낸 사건이다. 노동자들? 노동자들은 아무 책임도 없다. 언제 남한에서 노동자들에게 경영권과 관련된 권리를 인정해준 적이 있었나? 노동자들은 그냥 열심히 일하다 어느 날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책임을 떠안게 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때나 지금이나 이들이 요구하는 것은 한 가지다. 공장으로 돌아가서 일하게 해달라는 것.
솔직히 난 이들의 소박한 요구를 들을 때마다 가슴 한 쪽이 매우 안 좋다. 대체 언제부터 이 나라는 이런 소박한 요구조차 들어줄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일까? 물론 그 이유는 안다. 말로는 선진 경영이지만 속내는 값싼 노동력과 노동자의 인권따위는 개나 줘버리겠다는 나라로 생산 설비를 옮김으로서 인건비 감축을 통해 이윤을 극대화해보자는 신자유주의적 행태가 만연하는 한 이들의 요구는 결코 소박한 요구가 될 수 없다.
한동안은 이런 분위기가 유지될 것이고 이에 대한 뾰족한 대책도 별로 없을 것이다. 실업율은 계속 상승할 것이고 안정적인 일자리는 계속해서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것마저도 멈춰 버리는 순간이 올 것이다. 난 자본주의가 과연 그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갈지 매우 궁금하다.
2.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해다. 그리고 남한에 처음 칼라 TV가 보급된 해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몇년 전엔 처음으로 자동차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70년대부터 시작된 산업화는 왕성한 성장을 하게 된다. 물론 그 성장에 대해 아직도 많은 이들은 다까끼 마사오를 거론하지만 미안하게도 난 다까끼 마사오가 TV나 자동차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그걸 만든 이들은 그냥 평범한 노동자들, 다까끼 마사오의 독재정권아래에서 항의 한번 제대로 못 하고 죽도록 일만 한 노동자들이다.
물론 그 시절을 대충 순응하며 살아와서 그게 당연한 줄 알고 아직도 다까끼 마사오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사람들은 절대 동의하지 않을 테지만 말이다. 그리고 나 역시 그렇게 여기는 사람들에겐 그렇게 대접을 해줄 뿐이다. 그 당시의 구호대로 하면 그들은 그냥 열심히 일한 산업역군에 불과하다. 산업역군 대단할 것 없다. 지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만큼 힘들게 고생하며 살고 있다. 굳이 당신들이 특별한 대접을 받아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말이다. 상호 모순되는 두 가지를 한꺼번에 가지려고 들지 마라. 그건 지나친 욕심이고 지나친 욕심은 추하니까.
아무튼 그렇다. 그리고 나 역시 비록 어린 나이지만 그 시절을 경험하며 살았다. 비록 내가 과거따위를 기억하는 일같은 것에 무심한 사람이긴 하지만 그래도 가끔 10대 시절을 떠올려 보면 세상 참 많이 변했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그런데 그 사실자체가 외려 실감나지 않는 건 그 변화가 고작 30년만에 이루어졌다는 점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 우리는 우리보다 훨씬 앞서서 산업화를 이루었다는 나라들과 비슷한 수준의 위기, 자본주의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물론 자본주의는 불균등하게 시작했지만 국경을 넘나든다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이르면 위기역시 경제적 불균등과는 상관없이 모두의 것이 된다는 점이 크게 작용한 것이지만.
그래서 개인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별 것없는, 한심하다고 해도 별로 항의하기 힘든 인생이지만 그 인생이 겪고 있는 외부의 시간들은 매우 흥미롭다. 그러니까 서양에서부터 시작된 자본주의 역사 200년을 약 40년정도 되는 시간에 압축적으로 모아놓은 것을 고스란히 목격했으며 운이 좋으면(...) 자본주의의 몰락까지도 목격할 수 있는 세대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는게 재미있지도 않고 뭔가 보람있는 일을 하는 것도 아닌 인생이지만 가끔 이런 생각이 나면 그래도 남들만큼은 더 살아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