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학파는 부활하나?
내가 간혹 글에서도 인용하기도 했다. '오스트리아 학파' 고전 자본주의 경제학에서도 비주류에 속하는 학파다. 그런데 최근 이 오스트리아 학파가 새롭게 조명을 받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내 글에선 주로 신자유주의와 연결되며 다소 부정적인 어투로 인용되곤 했다. 그에 대한 글이다. 그리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반만 맞고 반쯤은 틀렸다. 인용하면서 미리 지적을 했어야 했지만 그러자니 글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그냥 넘어갔는데 이번에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일단 내가 신자유주의와 오스트리아 학파를 연결시키는 것은 반만 맞는 주장이다. 즉 신자유주의나 오스트리아 학파 모두 경제문제에 대해 국가가 개입하는 것을 반대한다는 점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같다. 그런데 현실에서 오스트리아 학파와 신자유주의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 그러니까 오스트리아 학파가 학자다운 강경한 노선을 견지한다면 신자유주의자들은 그저 자신들에게 이로운 것을 편취하는 형태다.
오스트리아 학파는 국가의 개입을 반대한다. 특히 이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중의 하나가 바로 국가의 인위적인 통화정책이다. 그리고 인위적인 통화정책의 대부분은 알다시피 통화량 증가 정책이다. 즉 총수요를 늘림으로서 경기를 회복시킬 수 있기 때문에 총수요를 늘리기 위해 총통화량을을 늘리는 것, 즉 '양적 완환'정책같은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케인즈주의를 반대한다. 이들은 국가의 개입으로 인한 인위적인 경제정책이 결과적으로 단기적인 효과만을 낼뿐 근본적인 대책은 되지 못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반면 신자유주의는 그런 거 없다. 이들이 국가의 개입을 반대한다고 말할 때 국가의 개입이란 기업의 활동에 제약을 가하는 경우를 지칭한다. 즉 자신들의 이윤 추구행위엔 아무런 제약도 없어야 하며 특히 국가의 개입을 가장 큰 장애물로 여김으로서 이를 무력화하려고 한다. 반면 오스트리아 학파와는 달리 통화량 증가 정책에 대해선 매우 관대한 편이다. 왜? 역시 이윤때문이다. 자본주의가 어느 정도 무르익어서 자본의 집중도가 높아지면 결국 늘어난 화폐의 대부분은 다시 자본의 집중도가 높은 쪽으로 쏠리게 마련이다. 즉 국가의 통화량 확대 정책이 자신들의 이윤추구에 이익이 되기 때문에 굳이 반대하지 않는 것이다.
이 정도가 오스트리아 학파와 신자유주의의 차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엄밀하게 말하자면 오스트리아 학파는 경제학의 관점에서 학문적 유파로서의 가치를 갖고 있는 반면 신자유주의는 경제학적 가치같은 건 전혀 없다. 그저 고도로 집중화된 지본을 보유한 이들이 자신들에게 이로운 결과를 얻기 위해 학문의 이름을 참칭하여 만들어낸 정치적 수작에 더 가깝다.(극단적인 비교는 힘들지 모르지만 오히려 오스트리아 학파보다는 밀턴 프리드먼을 전면에 내세운 시카고 학파가 신자유주의에게 더 그럴싸한 근거를 제공하고 있지 않은가 싶다)
그렇다면 국가의 불개입과 통화량 증가 정책을 비판한 오스트리아 학파가 다시금 관심을 받는 상황은 어떻게 봐야 할까? 물론 최근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경제적 문제들이 통화량의 증가와 어떻게든 관련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오스트리아 학파가 구세주 비슷한 것을 추앙받는 분위기도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오스트리아 학파의 주장을 보고 있으면 느껴지는 것이 없나?
단순화의 오류를 감수하고 말하자면 오스트리아 학파의 주장은 자본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자본주의 이전 프로테스탄티즘의 가치가 더 연상된다. 청교도 개혁의 금욕주의로부터 파생된 프로테스탄티즘은 근명성실함과 그로 인해 파생되는 부의 축적을 긍정하지만 과시와 같은 사치를 용납하지 않는다. 따라서 소비보다는 저축이 중요하고 이는 자본주의 발전의 기틀이 된다. 그리고 알다시피 어떤 역사적 해석을 달든 바로 이런 부의 집중으로부터 자본주의는 출발한다.
오스트리아 학파의 한계 역시 바로 이 지점에서 비롯된다. 오스트리아 학파가 청교도의 금욕주의에서 비롯된 프로테스탄티즘과 비슷한 주장을 편다고 하더라도 결국 자본은 집중은 일어날 것이고 이는 다시 더 많은 이윤창출을 원하는 자본주의의 고유한 길을 따라 걷게될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이 지점에서 오스트리아 학파는 경제의 주기에 따라 자연스럽게 과잉 축적과 거품은 해소될 것이라고 보지만 말이다.
물론 그렇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두 가지 문제가 남는다. 하나는 이미 잘 알려졌다시피 그 과정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가 하는 점이다. 자본의 집중은 그것이 그렇게 심각한 단계로 진행되지 않은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불황이 닥쳤을 경우 부자와 빈자간의 생존문제에서 차이를 낳는다. 이걸 방치하는 것이 올바른 일인가? 이걸 긍정한다면 가난의 죄악이라는 시각도 문제가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가난이 발생하는 이유가 단순히 게으름과 같은 개인적인 이유가 아니라는 수많은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난은 전적으로 개인의 문제이자 죄악으로 치부되는 것이다.
두번째 문제는 인간 문명의 발달이다. 인간 문명의 발달은 과학기술의 발달과 큰 연관이 있다. 그리고 과학기술의 발달에 결정적인 영향까지는 아니지만 지대한 영향을 준 것 역시 자본주의, 아니 엄밀하게 말하자면 자본의 집중이다. 즉 대규모화된 자본의 뒷받침이 없었다면 과학기술의 발달은 어려웠을 것이란 점이다. 물론 그 자체를 부정할 수도 있다. 이미 우리는 자본주의적 체제하에서 그런 경험을 했기 때문에 자본주의만이 과학기술의 발달을 추동한 단 하나의 길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레이건이 소련과 극단적 대치 국면을 벌이면서 정치쑈를 하던 시절에 미국이 꺼내든 가장 강력한 카드는 바로 통화팽창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동맹국들에게 미국이라는 가장 안정적이고 거대한 시장을 제공함으로서 그들의 경제성장을 도왔고 그 덕에 전 세계적인 맹주로서 자리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시절 소련 역시 과학기술이란 면에선 미국에 전혀 뒤떨어지지 않았다.(사실 지금도 그런 면에서 그다지 뒤떨어지지 않지만) 즉 자본주의가 아니라 국가독점 체제하에서도 부의 집중은 가능했고 이를 통한 과학기술 발전 역시 가능했던 것이다.
오스트리아 학파는 이 두 문제에 대해서 약점을 노출하고 있다. 가난의 문제는 구조적인 원인이 매우 큰 사회적 현상이지 온전히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인문사회학의 제 1명제를 무시한 것이기도 하다. 두번째로 인류의 역사에서 드러난 잘못을 시정하기 위해 과거로 회귀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우리가 지금 눈앞에서 벌어진 자본주의의 폐해를 막기 위해 전자본주의적 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니까. 어쨌든 오스트리아 학파가 이에 대한 대답을 가지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기억은 없는 것 같다.
당장 눈앞의 현실을 바라보는 데 있어서 상당히 유익한 시각을 제공해준다는 점은 분명히 인정해야 하지만 그 올바름이 문제해결이란 과정과 결과까지 자동적으로 연결되는 건 아니다.
어떤 식으로든 언제가 되었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소비의 시대, 자본주의의 시대가 종말을 고할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물론 그 전에 또 어떤 혁명적인 과학기술의 발달로 말미암아 이 문제는 해소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무한 동력기관을 개발하는 수준의 과학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한 분명한 것은 자본주의의 종말은 도래할 것이라는 점이다. 문제는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대부분의 경제학 이론들을 갖고는 이것을 해소할 가능성이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일 게다.
어쩌면 인류는 지금 폭탄 돌리기 게임의 첫번째 단계에 들어간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