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그맨은 참 힘든 직업이다.
개그는 타인의 감정을 움직이는 일이고 타인의 감정을 움직여야 하는 일은 참 힘들다. 게다가 영화나 음악처럼 충분한 연습과 준비기간을 갖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TV로 접하는 개그프로들 속에 등장하는 개그맨들은 그런 일을 일주일에 한 번씩 꼬박꼬박 해야 한다. 심지어 그 대상이 한 명이 아니라 불특정 다수라면 더 힘들 것이다. 어린 시절엔 조금만 재미가 없거나 지나치다 싶으면 눈살부터 찌푸렸는데 최근엔 안 그러는 것도 그런 이유 탓이다.
그래서일까? 난 가끔 가장 뛰어난 유머감각은 어떤 것일까라는 생각도 해본다. 그리고 얼마전에 그 비슷한 사례를 봤다. 예전 런닝맨 프로그램중에 못 본게 있어서 얼마 전에 다시 본게 있다. 한효주와 정우성이 등장하는 꼭지였다. 앞부분은 탈락자를 가리는 레이스고 뒷부분은 그 탈락자들과 정우성이 한 팀이 되서 정해진 룰에 따라 런닝맨들을 탈락시키는 것이었다.
그 꼭지중 앞 부분에 시장골목에서 각자 고른 미션을 수행하고 선착순으로 모이는 것이 있었다. 한효주는 떡뽁이들 먹고 오는 것이었고 지석진은 데이트중인 커플을 찾아오라는 것이었다. 우연찮게도 한효주의 미션장소인 떡뽁이 집에 커플이 있었고 지석진 역시 미션완수를 위해 그들을 데려가야만 했다. 물론 프로그램의 특성상 그들을 그냥 데리고 가기만 하는 건 이상한 일이다. 당연히 개그맨이란 직업을 갖고 있는 지석진은 그들에게 뻔한 질문을 했고 증간즈음엔 만세를 외치라는 정말 뻔한 주문을 하더라.
재미있는 장면을 목격한 것은 그 다음이었다. 커플이 지석진의 주문에 따라 만세를 외치는 데 옆에 서있던 한효주가 같이 만세를 외치더라. 이 장면에서 '왜 저러지?'란 생각을 한다면 그냥 평범한 시청자다. 반면 개그맨이라면 그걸 어떻게든 살렸을 것이다. 너무 흔해서 누구나 생각해낼 수 있는 것이 '너 부러워서 그러지'라는 것이다. 무척 식상한 발상이지만 주변 사람들이나 한효주의 반응에 따라 얼마든지 조금 더 재미있는 장면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개그맨인 지석진이 터트린 첫 마디는 '넌 왜 해?'라는 매우 시청자이자 제 3자스러운 반응이었다. 그리고 뒤이은 한효주의 '너무 예뻐서요'라는 뻔한 대답. 꽤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법한 상황이 그저 그런 흔한 장면이 되고 만다.
그리고 조금 뒤에 이 꼭지에서 가장 빛나는 장면이 이어진다. 유재석이 뽑은 미션은 '카메라를 가지고 있는 사람 찾아오기'. 명소라곤 하지만 재래시장에서 카메라든 사람 찾기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한참을 헤매던 유재석이 카메라든 사람이랍시고 데려온 사람은 자기를 전담해서 촬영하는 카메라맨이었다. 심지어 유재석은 '이 분이 아까부터 카메라를 들고 따라 다니더라'고 시치미를 떼기까지 한다. 물론 미션은 실패다. 그러나 그 실패조차도 단순한 실패가 아니라 웃음을 자아낼 수 있는 상황으로 연결시키는 능력이 돋보였다.
사람들은 유재석에 대해 배려, 성실과 겸손의 아이콘이라 부르며 친근감을 표하지만 그보다 먼저 인정받아야 할 것은 바로 이런 그의 개그능력이다.
인간은 누구나 언제나 특정한 상황을 접하면서 살아간다. 다른 날과 크게 다를 것 없는 평범하고 지루한 상황들의 반복일 수도 있고 기억에 평생 남을만큼 강렬한 상황일 수도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상황들에 대해서 제각각 가지고 있는 시각과 능력과 목적의식에 따라 대응하며 살아간다. 누군가는 좋은 상황이 주어져도 뻔한 대응으로 일관하거나 협소한 상상력 탓에 늘상 해오던 방식을 답습할 수도 있다. 반면 누군가는 뻔한 상황에서조차도 남들과 다른 대응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선보임으로서 상황을 주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늘상 해오던 것을 답습하는 삶이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그것도 중요한 능력이다. 단지 어떤 직업군에겐 그것이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특정한 직업군에겐 단순한 것을 반복하는 것보다 새로운 것을 찾아내고 경계를 허무는 능력이 더 필요한 법이다. 그런데 왜 그런 능력이 차이가 나는 걸까? 사람들은 그걸 재능의 차이, 타고난 능력의 차이라고 쉽게 규정한다.
그런데 그건 사실이 아니다. 인간의 모든 능력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후천적으로 학습되는 것이다. 누차 강조하지만 너무나 일상적이고 평범하며 반복적인 일이라고 해도 그걸 태어나면서부터 쉽게 해내는 사람은 없다. 밥상에서 밥알을 흘리지 않고 깨끗하게 먹는 건 어른에게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지만 아이들에겐 무척 험난한 일이다. 그렇다면 이건 노력의 차이일까?
물론 그렇다. 노력의 차이다. 그런데 난 그것에 앞서 목적의식의 차이를 먼저 거론하고 싶다. 목적의식이 중요한 건 노력의 방향을 잡아주기 때문이다. 남들몾지않게 노력했다는 사람들중에도 분명 남들보다 떨어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저지른 실수는 바로 무엇을 위해 그리고 어떤 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는가라는 목적의식의 문제다.
책을 많이 읽으면 좋다. 거의 모든 상황에서 무조건 좋다. 그러나 적어도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책을 보는 이들은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책속에서 찾아낼 가능성이 더 크다. 그것이 뻔한 것을 반복하는 이와 조금이라도 새로운 것을 보여주는 이의 차이다.
P.S.
간혹 무언가를 수단으로 다루는 것을 강박적으로 혐오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독서를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에 대해서 혐오감을 피력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이 독서를 수단으로 다루어선 안 된다고 주장하는 수많은 이유들조차 실은 독서를 수단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발생하는 이유들이다. '독서를 수단으로 다루지 말라'는 말은 그래서 어불성설이며 종교적 아집이다. '좋은 목적을 위해 독서를 수단으로 삼으라'는 것이 더 옳은 말일 것이다. 물론 이 말에도 '좋은 목적이 무엇이냐?'라는 매우 중차대한 의문이 남지만 그건 이야기가 무척 길어지니 생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