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조폭 영화와 한국 정치판.
옛날 홍콩 영화중에 '영웅본색'이란 게 있다. 지금 보면 엄청나게 유치한데 당시엔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다. 왜 그랬을까? 몇 가지 사실을 먼저 짚어볼 필요가 있다. 당시 영웅본색이란 영화는 개봉관에서부터 인기를 모은 영화가 아니었다. 재개봉관, 그러니까 개봉관보다 싼 가격에 영화를 두편이나 볼 수 있었던 영화관에서부터 인기몰이를 시작했다. 그리고 당시 재개봉관의 주된 관객층은 주로 고등학생들이었다.
여전히 검열이 판을 치던 시절이었고 대한뉴스에선 노동자들의 파업이 북한의 사주에 따른 국가전복 시도라는 되도 않는 개구라를 늘어놓던 시절이었다. 고등학생들이 개봉관에서 볼만한 영화같은 건 없었다. 그들에게 아무런 제약없이(...) 영화를 볼 수 있었던 곳은 오로지 재개봉관이었다. 명목상 행정관청과 학교에서 주기적으로 단속을 한다곤 했지만 당시 재개봉관 죽돌이였던 나조차도 단 한 번도 단속나온 걸 본 적이 없었다.
즉 영웅본색의 선풍적인 인기는 성인들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고등학생들로부터 시작된 바람이었던 것이다. 시간이 흘러 몇 해전인가 다시 볼 기회가 있었다. 옛날의 기억이 떠올라서 감회에 젖긴 했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참 유치한 영화였다. 물론 영화적인 성취라는 부분은 다르게 평가받아야 하지만 영화가 담고 있는 이야기나 스토리는 정말 유치하기 그지 없었다. 고등학생이었단 당시의 내가 그 영화를 보면서 영화의 기술적 성취같은 걸 알아볼 수준은 아니었다는 걸 고려하면 분명 나도 영화의 스토리와 정서에 감동비스무리한 걸 받았던 것이리라.(고백하자면 열광까지는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다시 보니 유치하다. 그렇다. 남성적 마초성, 의리니 우정이니 하는 것들에 호소하는 영화들은 대부분 다 유치하다. 나이가 조금만 더 들어도 손발이 오글거릴 지경이다. 그러니까 '영웅본색'과 그런 영화의 계보를 잇는 영화 '무간도'사이의 차이는 그런 것이다. 영웅본색은 비현실적인 남성적 마초성에 호소를 하지만 무간도는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는다. 헐라우드의 고전 서부극과 최근에 만들어지는 서부극의 차이도 그런 것들이다.
이 차이를 구분한다는 건 두 가지 방법으로 가능하다. 하나는 그냥 나이가 들다보면 저절로 가능해진다. 조폭들의 우정이니 의리니 하는 건 돈앞에선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아니 사실 그 어떤 대단한다는 가치들조차도 자본주의 사회에선 돈앞에서 무력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다. 두번째는 그런 것을 제대로 된 공부를 통해서 알게 되는 경우다. 인문학과 사회과학은 그런 영화들이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이미 그런 이야기를 해오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최소한 나이가 들면서 알아가야할 것들만 제대로 깨우치기만 했어도 그 둘을 구분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런데 정작 재미있는 건 한국 정치판을 보고 있으면 그것조차도 참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게 된다. 외려 한국이란 나라의 국민들의 정치의식은 홍콩 조폭 영화에서 볼 수 있는 미성숙한 의식과 닮아 있다. (주1)
조폭 영화에선 두목이 뭔 잘못을 해도 그냥 충성하고 지낸다. 범법행위로 돈을 벌어도 그저 의리라는 이름으로 용서하며 충성을 다짐한다. 그렇게 남한은 조폭스럽게 굴러가는 거다. 문제는 두목급들은 의리니 충성을 강조하고 그것이 세상 모든 가치인 양 떠들지만 정작 그들이 가장 관심을 갖는 건 권력이고 그 권력으로 사욕을 채우는 것이다. 그 멍청한 논리에 넘어가는 인간들은 그냥 조폭 영화에 자주 나오는 소모품인 거다. 영화 '초록물고기'에서 날카롭게 보여준 것처럼 말이다.
주1)
개인적으로 B급 정서라는 것에 대해서 반대하진 않지만 다른 것은 하나도 모르면서 그저 B급 정서만 갖고 있는 건 그냥 인간이 B급인 것일 뿐이다. B급 정서를 이해하고 그것을 인정하는 사람과 그냥 인간자체가 B급인 사람의 차이는 엄청나게 크다. 함정이라면 인간 자체가 B급인 사람은 B급 정서를 이해하지만 인간자체가 B급은 아닌 사람을 이해하지 못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B급 인간들은 주변 사람들이 다들 자기를 배신한다는 피해망상을 떠들고 다니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