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관계와 감정.
인간 관계가 불편하다는 문제의 대부분은 '사적 관계'애서 출발한다. 공적이고 사무적인 관계보다 친밀감과 공동체적 신뢰를 기반으로 한다는 사적 관계가 더 불편함을 야기한다는 것은 얼핏 이해하기 힘들지 모르지만 사실이다.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사무적인 관계는 감정이 끼어들 여지가 별로 없다. 일이 잘 되고 잘못되는 것의 공과가 명확하기 때문에 구태여 남의 잘못에 그렇게 열을 올릴 필요도 없다. 물론 그 잘못이 나에게 피해로 다가온다면 문제가 달라질 것이고 이것이 다음으로 설명할 사적 관계가 사무적인 관계보다 더 불편할 수 밖에 없는 주요한 근거다.
사적 관계가 문제를 야기하는 가장 큰 이유는 모든 행위의 경계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법인은 법인의 소유주로서의 이사/이사회가 존재한다. 만약 법인에 큰 문제가 발생하면 각 이사들이 나누어 갖고 있는 지분에 따라 책임을 지면 된다. 반면 가족과 같은 대표적인 사적 관계의 경우 그런 경계가 모호하다. '연로하신 부모님을 누가 모실 것인가?' 관습에 따르자면 장남이 그 책임을 진다고 하지만 그게 법처럼 강제력을 지닌 게 아니다. 당연히 갈등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이런 경계가 불분명한 문제의 해결이 지연되는 경우 감정적 갈등은 심각해지게 마련이고 신문 사회면의 뉴스로 등장하는 비극이 발생하는 법이다.
그래서 사적인 관계는 좋을 땐 한없이 좋지만 나빠지기 시작하면 바닥이 어딘지조차 모를 정도로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게다가 더욱 불행한 점은 이런 문제들이 사적인 관계에 놓인 사람들의 문제때문이라기 보다는 대부분 외부적인 요인들(주로 돈)에 의해 증폭된다는 점인데 알다시피 자본주의 사회는 그런 갈등을 조장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볼때 자칭 보수주의자들, 그러니까 가족, 민족, 국가같은 공동체의 안정과 안전을 중요한 가치로 삼는다는 보수주의자들이 자본주의를 적극 긍정한다는 건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보수주의자들이 적극적 자본주의, 신자유주의처럼 공동체의 안녕을 도모할 각종 공적 보호 도구들을 무력화하려는 주장애 동의한다는 건 우습지 않은가?
문제는 자칭 보수주의자들이 이처럼 스스로의 이념적 위치에 대한 자각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 대부분 극우 파시즘으로 흘러간다는 사실이다. 예전 독일의 나찌에 적극적으로 동조함으로서 사실상 나찌의 대중적 지지기반을 만들어주는데 혁혁한 공로를 세운 자칭 기독교 우파이자 보수주의자들이 바로 그런 사례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