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특정할 수 있는 존재인가?' pt.2.
1. 그렇다면 '노동자는 게으르다'란 주장, 즉 이런 식의 특정, 그것도 한 개인이 아닌 비슷한 공통점을 지닌 인간 집단에 대한 특정은 성립가능할까? 물론 당연히 성립할 수가 없다. 이건 그냥 편견이다. 특히 이른바 개발도상국 국가의 국민들에 대해 '게으르다'는 지적은 더더욱 그렇다.
난 어린 시절 서울 외곽의 작은 도시에서 살았다. 대부분 대가족이었고 집집마다 놀고 먹는 삼촌들이 꽤 되었다. 그들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일관성이 있었다. '사지가 멀쩡한 놈이 왜 집에서 빈둥거리느냐?' 물론 삼촌들도 나름의 타당한 이유는 있었다. 대부분이 다른 형제들에 비해 교육수준이 높지 않았고 때문에 좋은 직장이란 걸 얻기 힘들었다. 일은 많고 벌이는 적은 직장이 거의 유일한 선택지였던 셈이다. 그래서 그들 대부분은 그냥 놀고 먹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 물론 여기선 남녀간의 차이는 배제한다. 매우 심대한 차이를 보여주지만 여기선 중요한 주제가 아니니까.
다시 한 번 '게으르다'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인간의 특정한 성향은 특정한 상황과의 연결에 의해 드러난다는 점을 고려하자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게으른 인간이 아니라 '게을러지기를 선택했다'는 점이다. 즉 유발요인이 있다는 것이고 이 사건의 경우는 '변변찮은 일자리'가 그 원인인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꽤 괜찮은 일자리를 제공하면 그들중 상당수는 '게으름을 포기할 수도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노동자들이 게으른 건 애시당초 그들이 그렇게 생겨먹어서가 아니라 게으름을 선택하게 만든 요인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난 더 타당하다고 보는 편이다.
그렇다면 문제의식은 게으른 인간이 아니라 그 유발요인에 맞춰줘야 하는 것이 정상이라고 본다. 그리고 현대 경영학은 적어도 그런 점에선 꽤 많은 발전을 이룬 편이긴 하다. 물론 여전히 그 유발요인을 돈으로 한정한다는 점, 소비자들의 소비행태에 대한 연구가 눈부신 발전을 이루는 반면 노동행위에 대한 연구는 여전히 바닥(테일러리즘, 포디즘에서 더 진척이 없다)을 긴다는 점은 문제지만.
여기까진 자본주의에 대한 이야기.
2. 사실 '게으름'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내 머릿속 가장 깊숙한 곳에서 계속 튀어 나오는 생각은 우습게도 '게으르면 안 되나?'란 질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성실'이란 것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그 '성실'이란 것이 최종적으로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의문이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성실'이란 대부분 현실적 불안함을 바탕으로 작동한다. 즉 '지금 성실하게 일해서 돈을 모아 놓아야 노후에 편하다'라는 이른바 개미 대 베짱이 이론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런데 알다시피 인간에게 주어지거나 혹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에 이른바 '때'라는 것은 없다. 나이가 들어서 가는 여행과 젊어서 가는 여행은 사뭇 그 느낌이 다르다고들 하지 않던가? 그렇다면 왜 젊어서 열심히 돈을 벌고 나이가 들어선 그 돈가지고 놀러 다녀야만 한다고 말하는 걸까? 이건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리고 우습지만 난 그런 점에서 인간이 '성실'해야 한다고 본다. 즉 젊어서 돈도 벌고 여행도 다녀야 하고 나이가 들어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젊어서 돈벌고 나이들어서 놀러 다니라는 말은 사실과 거리가 멀며 이런 류의 언명들이 대부분 그렇듯 사람들이 그렇게 행동하면 이익을 얻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일종의 이데올로기라고 보는 편이다.
그렇다면 이런 언명을 통해 이득을 얻는 이들은 누구일까? 당연히 노동자들은 아니다. 오히려 파업, 즉 일을 하지 않는 행위를 통해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미루어 짐작해보면 노동자들의 게으름은 이른바 자본가들에게 피해가 된다(단편적으로 그렇다는 말이지 따지고 들어가보면 사실 그렇지도 않다)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할 것이다. 그 때문에 자본가들과 인지하든 그렇지 않든 그들의 이익에 도움을 주는 학자들이 이런 언명들을 유포하는 것이다.
게으름에 대한 두번째 이야기. 인간의 과학기술은 약 200년동안 비약적으로 발전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발전은 어떤 목표를 가지고 있는가? 앞서 언급한 개미 대 베짱이 이론에 의거하자면 과학시술의 발전의 최종적 지향점은 '게으르기 위해서'다. 물론 여기서 게으름이란 단순히 빈둥댄다(... 하지만 난 좋아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노동으로부터, 즉 먹고살기 위한 생존을 위한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실제로 대부분의 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라붙는 이유들에서 이건 빠지지 않는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세상이 되었는가란 질문을 던지면 답은 '글쎄올씨다'다. 즉 생산과 소비, 효울과 이윤을 중심으로 하는 체제(자본주의만이 지칭하는 게 아님) 에선 인간의 삶이 편리해지고 안락하지며 심지어 게을러질 수 있다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주장했지만 불행히도 아직까지 그런 목표에 이르지 못 했다.
그러니까 근 200여년동안 우리는 그 말이 실현될 것이라 믿으며 그 말에 충실한 삶을 살아온 셈인데 불행히도 아직 그런 세상은 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그런 세상이 올까? 불확실하긴 하지만 온다면 좋겠지만 만약 오지 않는다면?
물론 어느 과학자가 무한동력기, 그것도 상당한 수준의 에너지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무한동력기를 개발하는 순간 그런 세상이 도래할 것이다라고 주장하면 어느 정도 설득력은 있겠지만 그것 자체도 사실 요워하고 이미 200년동안 해봤는데도 그런 상태에 도달하지 못 했다면 이제 슬슬 포기하고 다른 길을 알아볼 때도 된 것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