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반복되는 이유.
1.
사실 답은 아주 간단하다. '발전'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발전이란 것이 있다면 역사는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는 이렇게 간단히 설명이 가능할까? 그렇진 않다. 몇 가지 문제가 남는다.
하나는 '과연' 역사는 반복되는가하는 점이다. 반쯤 맞다. 반복은 되지만 그렇다고 똑같이 반복되는 건 아니다. 인류 역사에 기록된 수많은 전쟁들은 대부분 전쟁이란 행위가 가지는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원인 역시 드러난 것만 보면 사뭇 달라보이지만 실상 그 속성은 대동소이하다. 즉 속성은 비슷하지만 드러나는 구체적인 현실은 다르다. 칼과 창, 활들고 싸우던 시절과 총들고 싸우는 건 누가 봐도 양상이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 차이 중 어느 것에 더 방점을 찍는가에 따라 시각 역시 사뭇 달라진다. '무얼 가지고 싸우는가'에 방점을 찍으면 변화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고 '무엇때문에 싸우는가'에 방점을 찍으면 반복에 더 무게를 두는 셈이다.
일반적으로 이렇게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후자가 더 중요하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그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무얼 가지고 싸우는가'가 '무엇때문에 싸우는가'를 넘어서는 경우도 있다. 가장 비근한 사례가 바로 원자폭탄같은 경우다. 즉 사용하는 무기의 살상력이란 것이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전쟁의 승패자체가 무의미해는 경우라면 '무엇때문에 싸우는가'보다 '무얼 가지고 싸우는가'가 더 중요할 수 밖에 없다.
또 다른 경우는 '무엇때문에 싸우는가'에 대한 이해도의 차이다. 이는 앞서 언급한 '드러난 원인의 차이'란 부분이다. 전쟁은 대부분 인종, 민족, 국가, 심지어 종교간의 갈등이 그 원인으로 지목된다. 재미있는 건 이 가치들이 동일하게 취급받는 건 아니란 사실이다. 이들중 하나의 가치를 절대적인 것으로 추앙한다고 해서 다른 나머지 것들도 그렇게 바라보진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좀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들 중 하나의 가치를 절대시하는 인간들 대부분은 사실 다른 가치들에 대해선 아예 별 생각이 없다. 왜? 하나의 가치를 절대시한다는 건 그 가치를 제외한 다른 모든 가치들이 무화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건 그런 태도가 종종 마치 다양성의 인정과 같은 태도로 오인받는다는 점이다. 남한의 극우 파시스트들의 무관심함이 마치 그네들도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람들이란 식으로 오인되는 것이 그런 경우다. 하지만 강조하건데 그들은 그냥 무관심하고 아무 생각도 없는 것이지 다양성을 존종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이건 꽤 중요한 인식인게 이걸 인지하지 못 하면 그 옛날 어느 극우 파시스트당 소속의 정치인이 벌인 단식쑈에 대학생들이 폭식투쟁이란 쑈로 응수한 것과 아끼는 가족을 구조적인 문제로부터 비롯된 사고로 잃은 이들이 진상규명을 위해 벌이는 단식 투쟁을 쑈로 치부하고 그 앞에서 폭식이란 쑈를 벌인 행위를 동일한 것이라도 되는 양 치부하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그것도 평등이란 이름으로 부르는 얼척없는 행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조금 더 신랄하게 말하자면 이건 '사실을 오도하는 정치적 마타도어와 다를 바가 없다'고 본다. 더 언급할 테지만 이런 차이를 무시하는 건 '심층적인 원인'을 무시하고 '표피적인 원인'에 지나치게 집중하는 오류인 셈이다. 물론 그런 류의 언급을 하는 이들의 대부분의 나쁜 정치적 의도를 갖고 있는 건 아닐 거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것이 오류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이건 뒤의 강준만 대 진중권 논쟁 부분에서도 언급할 것이다.
아무튼 실제로 전쟁을 일으키는 그 수많은 원인들의 표피를 넘어 들어가보면 그들 모두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차별'이고 '근본주의'다. 그리고 알다시피 인종, 민족, 국가, 심지어 종교란 것들이 그렇게 절대적인 가치로 존중받을만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비루먹을 가치란 것들을 사수한다는 명목하에 대규모 살인이 자행되어온 것이 전쟁이다.
즉 그 가치란 것들이 그렇게 절대시할만한 것이 아니란 것을 모르는 이들이 전쟁이란 비극을 만들어 내는 것이고 결국 더 근본적인 원인은 '무지'인 셈이다. 그 기준, 즉 무지란 시각에서 보자면 여전히 역사는 반복된다는 시각은 꽤 유효하다.
2.
진중권과 강준만이 이번 선거판에 대해서 논쟁을 벌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논쟁은 앞서 언급한 '역사는 반복되는가'만큼이나 해묵은 논쟁이고 그 양상 역시 비슷하다. 사실 그 둘이 논쟁을 벌인다고 하지만 앞서 역사의 반복에 대해 언급한 것처럼 조금 자세하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표피적인 원인', '심층적인 원인'. 이 두 가지를 놓고 보자면 '더 심층적인 원인'이란 부분에선 이 둘 사이에 두드러지는 차이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차이는 '표피적인 원인'에서 나타날 뿐이다. 강준만은 '태도'를 문제삼고 진중권은 '메시지'를 문제삼는다. 이 둘 모두 선거란 구체적인 행위에서 드러나는 부분들이고 대체로 방법적인 측면의 문제다. 그렇다면 사실 이 둘 사이엔 별다른 차이가 없는 게 아닐까? 그런데 이게 그렇지가 않다. '태도'를 문제삼는 것과 '메시지'를 문제삼는 것은 꽤 차이가 크다.
강준만이 문제를 삼는 태도의 경우 결국 최종적인 목표는 '대화의 가능성'이란 측면이다. 즉 '진보란 이들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들어서 난 보수다'라는 별 시답잖은 헛소리를 늘어놓는 모질이라고 해도 그들을 변화시키거나 혹은 이런 류의 시각이 지나치게 계몽주의적이어서 싫다는 이들이 자주 하는 말처럼 상호 협력해서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선 결국 그들을 인정하는 태도가 중요한 것이다.
반면 진중권의 경우를 보면 사실 그 가능성을 그다지 신뢰하는 편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즉 중요한 것은 이슈지 태도가 아닌 거다. 이를 테면 이번 선거처럼 권력을 사유화하는 극우 파시스트 집단, 구조적인 문제로 인해 발생한 인재조차도 단지 우연한 사고라고 치부하는 집단이 선거에서 이루어지지도 않을 경제발전이란 구라를 전면에 내세웠다는 이유만으로 선거에서 이기는 것이 바로 그런 사례인 셈이다.
이 정도의 차이가 있다. 그리고 조금 더 언급할 부분은 이 둘사이의 논쟁을 다루는 이들이나 매체들 중 뭔가 아주 큰 착각을 일으키는경우에 대해서다. 꽤 많은 이들이 이들중 강준만에 대해서 조금 덜 권위적이거나 혹은 덜 계몽주의적이라는 견해를 보인다. 그런데 그건 착각이다. 단지 진중권이 태도를 문제삼지 않는다고 해서 권위적이거나 계몽주의적인 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진중권이 그 문제에 집중하지 않는 건 대부분의 인간을 획일적인 존재 혹은 이른바 자유의지(계몽주의에서 말하는 그것과는 조금 다르겠지만...)란 것을 가진 존재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강준만의 경우는 그 반대다. 마치 대화를 통해 한 사람의 인식을 바꾸거나 혹은 공유하게 됨으로서 세상이 달라진다는 것은 개별적인 인간의 자유의지란 것에 방점을 찍는 것인데 이런 시각이야말로 오히려 계몽주의의 그것이다.
'근대를 넘어섰다'는 것은 단순히 계몽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근대가 가지는 가장 큰 특징은 인간의 이성에 큰 방점을 찍는다는 점인데 이것은 대체로 경제학에서 인간을 합리적인 존재로 가정하는 것과 동일한 오류를 안고 있다. 때문에 탈근대의 시각에서 보자면 인간은 결코 합리적이지도, 일관성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고 간주되며 실상 그것이 사실이라는 건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즉 진중권의 시각은 근대나 계몽주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으며 차라리 강준만의 시각이 계몽주의에 더 가깝다고 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주의할 것은 내가 지적하는 것이 강준만이나 진중권중 둘중 하나가 틀렸다라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 논쟁을 바라보는 이들이 계몽주의나 근대적 시각에 대해서 다소 엉뚱한 시각을 노출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강준만이 그런 의도로 태도를 언급했을까? 난 아니라고 본다. 그는 그저 민주주의적 원칙하에서 상호 대화의 가능성이란 부분에 집중한 것일 뿐이다. 그것이 얼마나 유효한 것인가라는 질문과는 상관없이 말이다. 그리고 그런 지적은 원칙적으로 늘 옳은 태도다. 그러니까 내가 강준만이 틀렸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다. 진보를 자처하는 인간들중 강준만이 지적한 문제있는 태도를 보이는 이들이 허다하기 때문이다. 자기가 잘 아는 문제에 대해서 다른 견해를 내놓았다고 모르면 침묵하라는 파시스트적 언사를 지껄이거나 어떤 사건의 책임을 직접적으로 연루되지도 않는 인간이나 집단에게 있다는 식의 언급을 함부로 늘어놓는 인간들이 진보를 자처하는 경우를 이미 수도 없이, 그것도 질릴 정도로 봐왔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앞서 언급한 '진보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들어서 보수를 택했다'라는 이들의 주장에 동의한다거나 하는 건 아니다. 이런 류의 감정적으로 소심하고 자기파괴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것은 본인이 알아서 할 문제지만 그런 태도가 권장할만한 것이 아니라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니까. 그러니까 '벼룩잡자고 초가삼간 태우는건' 멍청한 짓인데 그 멍청한 짓을 멍청하다고 인지하지 못 하는 게 자랑은 아니라는 거다.
아무튼 익히 잘 알려져있다시피 이런 류의 자칭 진보들의 얼척없는 주장에 충실히 따르자면 극도로 고도화된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이들이 아니라면 아예 말이란 것을 하면 안 된다. 그리고 이런 세상은 권력이 고도로 집중화된 세상, 즉 고도로 독재화된 파시스트 국가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기준에서 볼때 진중권을 까대는 얼척없는 진보들에 비해 진중권이 훨씬 더 나은 인간인 것도 바로 이런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