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
얼마전에 아는 친구와 후배들 모임에서 외국인 노동자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뭐 그런 성향을 가진 이들의 모임같은 건 아니었는데 그냥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보니 나온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던 후배 하나가 퉁명스럽게 이런 말을 하더라. '그런 별 상관도 없는 사람들 걱정하지 말고 우리 나라 기러기 아빠들 걱정이나 하는게 어떠냐'고.
나랑 그래도 잘 아는 사이인 후배라면 적어도 이제 이런 류의 황당무계한 헛소리는 하지 않을 테지만 불행히도 그 후배는 두어다리 건너 아는 관계라 용감하게도 이런 소리를 하더라.
"그게 지금 이거랑 무슨 상관인데?"
"상관도 없는 사람들 신경쓰는 것 보다는 조금이라도 관계있는 사람들 신경쓰는 게 낫죠."
"난 기러기 아빠랑 별 상관없는 사람이라 갸들이나 외국인 노동자나 별 차이없는데?"
"외국인하고 같은 민족하고 같아요?"
"다른 건 또 뭐냐?"
"국적과 민족이 다르죠."
"그게 그렇게 대수냐? 어디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그게 그렇게 결정적인 문제가 되냐?"
"...... 그래도 그렇게 별 상관없는 사람들 인권까지 신경써주면서 왜 그런 사람들은 신경 안써주느냐는 거죠."
"나나 이 자리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의 인권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중에 한 명이라도 기러기 아빠들의 사정같은 건 무시해도 괜찮다고 말한 적 있냐?"
"......"
"내 기억엔 오늘 이 자리에서 그런 말 나온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넌 왜 사람들이 하지도 않은 말을 마치 한 것처럼 단정짓고 불만이란 소리를 하는 거냐?"
"......"
당연히 분위기가 싸해졌고 그 모임은 대충 친한 이들끼리 이리저리 찢어지는 결과를 맞았다. 사실 한 머디 더 하고 싶었는데 분위기가 워낙 싸해지는 바람에 그냥 포기했다. 그 말은 이런 거였다.
"나도 너처럼 하지도 않은 말 대충 유추해서 너한데 말해볼까? 사는 게 워낙 심심해서 뭐 자극적인 게 없나 찾게 되더라도 나이먹고 일베같은데 가서 노는 직은 하지 마라. 그 동네 못난 것들이 그런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주로 하더라."
나이나 어리면, 그러니까 일베에서 별 생각없이 헤헤거리면서 자기가 무슨 소리하는지조차 제대로 모르는 어리고 어리석은 모질이들이라면 그래도 봐줄만 하겠는데 이건 이제 곧 나이 40줄에 접어든다는 녀석이 초보적인 분별력도 못 갖춘 걸 보니 짜증이 절로 나더라. 그렇다고 이 한 가지 사실로 그 녀석을 마냥 얼빠진 놈으로 볼 수 있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학상 시절 남들보다 열심히 공부해서 나름 탄탄한 중소기업의 중간간부로 능력을 인정받고 있는 편이라고 하며 인생사 별로 모나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와서 알맞은 나이에 결혼도 했고 남들이 이혼이다 뭐다 떠들때 무탈한 가정을 잘 이끌고 있으며 덕택에 애도 있어서 조금있으면 초등학교에 입학할 예정이란다. 그러니까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건실한 가장인 거다.
그러니까 그것과 이것은 대부분의 경우 별개의 사건, 하지만 같은 사람안의 상호모순된 인식이 되는 셈이다. 물론 살아가면서 이 두 가지가 단 한번도 맞닥뜨리지 않는다면 그의 인생사에 별다른 풍파같은 건 발생하지 않을 거다. 그리고 아마도 그 녀석은 그렇게 살아왔을 것이고. 그런데 어쩌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우리는 2차대전 당시 유대인 학살에 적극 가담한 아이히만을 또 다니 만날 수도 있게 되는 거다.
물론 난 개인적으로 보통 인간은 대부분 모순적이라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그런 상호모순성들이 갈등을 빚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구현되는 것이 가장 살기좋은 세상일 거라고 본다. 그런데 또 문제는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라 그런 인식적으로 완벽한 세상같은 건 구현될 가능성이 전무하다고 본다. 결국 그 상호모순성은 어떤 식으로든 갈등을 일으킬 수 밖에 없는데 이 경우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 상호모순에 대해서 알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불행한 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걸 아예 모르거나 혹은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사후적으로 합리화를 위한 궤변을 늘어놓는다는 점이다. 여기서 더 불행한 사실은 대부분의 인간이 그렇기 때문에 합리화를 위한 개구라에 불과한 소리라고 해도 자신의 이익, 자존감같은 무형의 이익과 관련된 문제기 때문에 그 개구라를 맞는 말이라고 우길 거라는 거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런 식으로 우기기 시작하면 답이 없다는 거다.
예상컨데 아마 그 후배는 그 자리가 파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자리에서 자기 말이 맞다고 우겼을 거다. 잘 알진 못 하지만 어쨌거나 내가 선배니 그냥 그 자리에서만 조용히 있었던 것일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