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은 늘 시궁창

논란은 재미를 부른다.

The Skeptic 2014. 12. 23. 17:52

'논란'을 '재미'와 결부시키는 것은 물론 결코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다. 논란은 그것이 어떤 형태의 논란이든 한 시대의 특정한 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이 드러나는 과정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그걸 고작 재미로 바라보는 건 매우 무책임한 태도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태도를 정치적으로 '쿨하다'고 여기는 덜 떨어진 것들도 있고 아예 무관심한 이들도 많다는 게 더 큰 문제긴 하지만. 아무튼 그렇더라도 재미로 바라보는 건 좋은 태도는 아니다.(강조하지만 그래서 진보주의자로 사는 게 힘들다는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혹 그런 태도가 필요한 경우가 있는데 대부분 개인적인 이유다. 나 역시도 가끔 그런 태도를 견지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중 대부분은 그런 태도를 견지하지 않는다면 열통이 터질 것 같기 때문이다. 일종의 보호본능일 거다. 


최근에 내게 그런 태도를 강요한 사건은 '통진당 해산결정'이다. 그에 대한 내 견해는 이미 적시한 바가 있다. 애시당초 헌재같은 사법기관에서 판단할 사안자체가 아니었다는 것이 내 시각이다. 이건 마치 세월호 사건 당시 해경이 문제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 했으니 해경을 없애버리면 된다는 류의 멍청한 발상에 다름아니니까. 이런 미성숙한 생각을 하는 것들이 남한의 위정자이고 사법부의 상층부란다.(같은 의미에서 근본주의 기독교 역시 그 자체로 미성숙이다)


그런데 이 논란을 둘러싸고 재미있는 현상들이 벌어지고 있다. 대체로 그 대부분은 앞서 언급한 미성숙과 무분별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 한다. 이를 테면 노무현 대통령 탄핵 당시엔 헌재의 부결판정을 찬성하는 이들이 이번 판결에 대해선 헌재를 비난한다는 식의 주장이다. 이런 류의 주장이 기대고 있는 바는 '왕은 하늘이 내린다'는 류의 전근대적 봉건주의적 속성을 버리지 못한 시대착오적 발상이다. 높으신 분들이 내린 결정이니 무조건 믿고 따르라는 노예근성인 셈이다. 


그런 부류들을 넘어선 재미있는 주장들도 있다. 이를 테면 '통진당은 진보정당이 아니기 때문에 이번 판결이 진보정당이나 진보운동에 대한 심대한 타격이란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란 주장이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난 이 문제가 단순히 특정한 이념을 지닌 정당에 대한 법적 판단이 아니란 이야기를 했다. 아예 사법적 판단의 대상이 아니란 것이 내 주장이다. 그런데 몇몇 이들의 주장에 따르자면 이상하게도 이 문제가 갑자기 남한 사회 진보 운동의 성격 규정의 문제가 된다. 


개인적으로 이번 판결에 대한 내 판단은 진보나 보수같은 이념적 지형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고 본다. 난 의회 민주주의와 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이라고보는 편이고 그런 시각에서 이번 판결이 민주주의와 민주주의적 절차에 대한 부정이라고 본다. 즉 이념이나 사상의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에 대한 부정이라고 보는 거다. 이건 진보나 보수와는 그다지 큰 연관이 없다. 그런데 누군가에겐 이게 이념이나 사상의 문제가 된다. 이게 제대로 된 시각일까? 난 절대 아니라고 본다. 


그런데 문제가 재미있어지는 지점은 바로 이 지점에서다. 그런 주장을 펼치는 이들은 과연 무엇 혹은 어떤 것을 진보라고 보는 걸까? 이미 여러 번 지적했지만 박그네와 새누리당 애들이 병*같은 빗을 해왔고 새정치연합도 별반 다를 것 없는 짓을 해왔지만 그 대안으로 진보정당이 발돋움하지 못한 걸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물론 그 이유들중 가장 주요한 원인이 선거와 같은 형식적 절차의 미비함에 있긴 하다. 현재처럼 '승자독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상에선 진보정당처럼 작은 군소정당들은 의회내에서 힘을 갖기가 힘들다. 오로지 미국식 양당제라는 정치적으로 빈약한 체제만이 가능할 뿐이다. 여전히 구조가 개인보다 더 우월하다는 입장인 난 이런 구조적 문제가 남한에서 진보정당 혹은 진보운동이 대중적인 입지를 확보하지 못 하는 중요한 이유라고 본다. 


그러나 단순히 그 문제만일까? 그렇다고 내가 진보를 자처하는 개인들의 인식같은 문제를 거론하고 싶은 건 아니다. 적어도 진보를 자처하는 이들이라면 최소한 자기 성찰이란 과정을 무시하지 않는 이들이니 혹여 그런 문제가 있다한들 그것이 영구적이거나 혹은 결정적인 문제가 될 가능성은 낮다고 본다. 뒤집어 말하면 이걸 무시하는 이들은 진보라 볼 수 없다는 의미기도 한데 불행하게도 그런 이들 꽤 많긴 하다. 


아무튼 내가 지적하고 싶은 바는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역시 현실적인 구조의 문제다. 단순하게 질문하자면 이런 거다. '과연 진보적인 의제가 사람들의 주된 관심사로 떠오를만한 상황인가' 인정하긴 싫지만 대체로 대부분의 인간은 '곶간에서 인심나는 법'이다. 자기 앞가림조차도 힘든 상황에서 다른 이들의 처지를 신경써 줄 수 있는 인간은 정말 몇 안 된다. 그런 차원에서 보자면 최소한의 자기 앞가림이 가능한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데 불행하게도 그 문제는 이제 단순히 한 국가의 정책적 의제로 해결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 


게다가 이 문제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라는 다분히 보수적인 가치(조금 의아할지 모르지만 난 이 의제가 진보적이라고 보지 않는다)로부터 시작해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힘들도록 만드는 소비자본주의에 대한 점진적(점진적이 아니어도 상관없지만 알다시피 급진적인 추진은 많은 문제를 낳기 때문에 별로 권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부분적 부정이란 다소 급진적인 진보적 의제까지 걸쳐져 있는데 알다시피 이중 전자는 꽤 많은 대중적 공감을 얻고 있지만 후자는 사실 대중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런데 정작 진보를 자처하는 이들중 전자의 문제가 후자와 필연적으로 연결되며 전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후자의 문제에도 지속적인 관심과 변화를 이끌어 내야한다는 걸 연결시켜 설명하고 주장하는 경우는 거의 보기 힘들다. 심지어 간혹 등장하는 어떤 어처구니들은 전자의 문제를 거치지도 않은 채 후자를 주장하는 엉뚱한 짓을 하는 것도 볼 수 있다. 이것이 옳은데 정작 그게 왜 옳은지는 설명하지 못하는 식인데 사실 이 정도면 그냥 논점 이탈과 모순을 그 종족 특성으로 삼고 있는 극우와 크게 다를 바도 없다. 


세상이 그렇다. 생각이란 걸 하는 걸 거부하기로 한 극우들은 살기 참 편하지만 시시각각 변화하는 세상사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그 문제의 인과관계를 찾아야 하는 진보는 살기 힘들다. 그런데 그걸 포기하는 순간 그는 이미 진보가 아닌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