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은 늘 시궁창

일본의 선언, 그 이면.

The Skeptic 2015. 10. 30. 14:26

얼마 전 일본이 '현 시점에서 남한의 실효적 지배지역은 휴전선 이남이다'라는 발언을 했다. 최근 한반도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정세를 보고 있으면 심상치 않은 발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남한의 진보라는 그룹에선 이에 대해서 별다른 반응들이 없다. 특히 통진당 사건 이후로 급격하게 세가 약화된 과거 NL그룹의 발언권이 약화된 덕에 더더욱 그렇다. 심지어 어떤 자칭 진보류들은 '어쨌든 사실이 아니냐?'라는 반응을 보일 정도다. 


과거 학생 운동권중 PD 그룹이나 혹은 자유주의자, 중도들이 의외로 굉장히 무관심하다못해 무식해 보이는 분야중의 하나가 바로 이 지점이다. 그들의 언행을 보고 있노라면 '제국주의'에 대해 아무 생각도 없어 보인다. 


난 그게 정말로 납득이 안 가는 게 그들이야말로 정통 막스의 후예임을 자처했던 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막스는 자본주의의 최종 지향점이 제국주의라고 했다. 그런데 그의 후예란 이들이 제국주의에 대해서 아무런 경각심이 없다는 건 납득하기가 힘들다. 


물론 현실 사회주의권의 붕괴 이후 등장한 수많은 포스트 막스주의 이론들이 막스의 그러한 예측을 부정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들의 태도가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긴 한다만 그래도 제국주의에 대한 이해도 자체가 이토록 낮다는 것까지 설명해주진 않는다고 본다. 오히려 '설마 그런 상황이 벌어지겠어?'라는 심정적 단정을 먼저 내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내 눈엔 그렇게 감상적인 판단을 내릴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기본적으로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의 이해관계가 엄청나게 달라졌다. 


1. 중국은 이제 북한과 혈맹관계가 아니다. 중국과 북한의 혁명 1세대들은 실제로 서로를 피를 나눈 동지로 여긴다. 실제로도 그랬고.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게다가 중국이 처한 외교정치적 입지도 상당히 변화했다. 러시아의 퇴보 이후 이제 중국은 미국과 자웅을 겨룰 유일한 국가가 되었으며 국제사회에서도 이전과는 다른 주목을 받는 국가가 되었다. 예전처럼 미친 척 하고 북한으 편들어줄 상황이 아니다. 


2. 일본은 극우 아베의 폭주이후 '전쟁이 가능한 보통 국가'로 넘어가기 위한 작업에 돌입했다. 국제정세에 무식한 진보, 중도 아류들은 잘 모르겠지만 이런 작업의 배경엔 미국이 존재한다. 극우 아베가 부정한 일본은 이미 2차대전 당시 제국주의 일본의 직접 항복을 받았고 이어진 미국의 사실상의 지배 체제하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여전히 많은 부분에서 미국에 의존하고 있는 일본이 단순히 자신들의 의지만으로 그런 변화를 이루었다고 볼 순 없다. 적어도 미국의 방조정도는 예상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극우 아베의 노선을 방조한 걸까? 단순하다. 동아시아에서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는 강력한 우방국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런 류의 국제 정책은 이미 미국이 중동을 대할 때 부터 사용해온 익숙한 방식이다. 조금 더 언급하자면 이런 방식은 미국에겐 유리한 결과를 만들지만 정작 그 지역엔 끊임없는 분쟁의 씨앗이 되었다. 극우 아베의 폭주가 우려스러운 것도 그 때문이다. 


3. 중국도 그런 사정을 모르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에게도 나름의 대응이 필요한데 문제는 여전히 국방력만 놓고 보자면 중국은 미국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단순히 무기의 양과 질에 대한 언급이 아니다. 미국은 이미 전 세계의 수많은 분쟁 지역에 직접적으로 가담하고 있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그 분쟁지역들중 상당수는 냉전 시절 미국과 소련이 뿌려놓은 씨앗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이런 경우 상대적으로 약자인 이들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식은 일단 시간을 버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동안 변화가 일어나기를 바래야 한다. 그것이 내부의 성장이든 외부의 약화이든 간에 말이다. 중국 입장에서 가장 현명한 선택은 어떤 분야든 미국을 따라잡을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는 것이다. 이미 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된 입장에서 보자면 경제력의 성장이 가장 좋을 것이다. 중국 입장에서 그 시간이 필요하다. 


4. 당연히 중국 입장에서 미국과의 유화 제스처를 위해서 가장 좋은 소재는 바로 북한이다. 북한으로 하여금 미국의 요구에 어느 정도 응하도록 만들고 자신의 공을 내세우는 것이 여러 면에서 가장 좋다. 


5. 어쩌면 현재 북한은 미국과 대치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중국과도 대치를 해야 하는 상황인 거다. 분단 당사자인 남한과 북한의 입장같은 건 전혀 고려되지 않은 채 분단 이후 가장 획기적인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일본 역시 그런 변화를 모를 리가 없다. 



'현 시점에서 남한의 실효적 지배지역은 휴전선 이남이다'라는 발언이 담고 있는 의미는 단순히 일본이 남한의 동의없이 단독으로 북한에서 군사작전을 수행할 수 있다는 가능성만을 언급한 것이 아니다. 


한반도에서 북한과 관련된 여하한 종류의 급격한 변화가 발생한다면 일본이 미국의 대리인으로서 북한을 물리적으로 지배할 수도 있다는 의미인 거다. 그걸 일부러 지극히 현실적인 사실을 언급하는 것으로 에둘러 표현한 셈이다. 


물론 2차대전 이후 일본이 동아시아 국가들에게서 받고 있는 극도록 부정적인 평가들을 고려하자면 일본이 그런 식으로 한반도 문제에 개입하는 건 엄청난 무리가 따른다. 하지만 이미 언급한 것처럼 일본의 뒤를 미국이 봐준다면 이야기는 많이 달라진다. 어쩌면 북한은 중국과 미국의 대리인인 일본에 의해 사실상 또 한 번 분단될수도 있다. 


꿈같은 이야기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실제로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이런 류의 발언들이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북한과 중국은 신경을 곤두세울 것이다. 


사실상 미국의 방조하에 극우 제국주의의 부활을 노리는 일본이 아무런 의도없이 단순히 실수로 그것도 하나마나한 현실적인 이야기를 했다? 그것도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국경 문제를? 


바둑을 둘 때 누가 봐도 뻔한 수로 응수타진을 하는 건 아주 하수거나 아주 고수거나 둘중의 하나란 의미다. 일본의 이 발언은 얼척없는 실수거나 아니면 한반도의 정세변화를 예견한 혹은 이미 어느 정도 합의된 변화의 로드맵에 따라 이루어진 고도의 응수타진인 거다. 그 대상이 남한이고. 


새누리당이나 박그네는 이런 상황을 모를 수도 있다. 무식하고 무능하며 종교적 광신에 빠진 집단이니까. 그런데 진보와 중도를 자처하는 이들까지 이 부분에 대해서 무심하다는 건 납득하기 힘들다. 


만약 진짜로 그와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어떨까? 미국과 중국이 사이좋게 북한을 나눠 점령한다면 모르겠지만 일본이 미국의 대리인으로서 북한을 점령한다면? 남한의 반응은? 뒤집어 말하면 일본은 이미 그런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암시한 것일 수도 있다. 반복적인 암시가 최종적으로 원하는 목적은 바로 그 암시를 무의식적으로 인정하도록 만드는 데 있다. 


노파심일 수도 있다. 내가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하지만 가능성을 열어놓는 건 손해나는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