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라 해서 남들도 똑같게 생각하진 않는다. 이건 진실이다. 인간들이 모여사는 모든 시간과 공간을 관통하는 진실중의 하나다. 다만 인간만이 그 진실을 모르거나 뒤늦게 깨닫거나 깨닫더라도 미련을 버리지 못할 뿐이다. 그리고 인간이 그런 존재라는 것 역시 변하지 않는 진실중의 하나다. 바로 이 미련한 주관성과 흔들림없는 진실사이에서 쇳소리가 나게 마련이다.
그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던 일종의 편견이 어느 정도 사실이란 것이 얼마전에 밝혀진 듯 하다. 우연인지 몰라도 사람들이 그의 영화중의 '빈집'을 두고 '달라졌다'고 평하던 무렾부터 난 그의 영화를 보지 못했다. 보지 않은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사정들로 인해 영화를 '골라서 볼'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없었던 탓이다. 그런 그가 대한민국 영화판에 대해서 마침내 투정을 부렸다. 그도 역시 별 수없는 인간인 탓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대체로 여러 가지 무지개 빛 성향들을 모두 가지고 있다. 다만 우리는 그중의 한 가지만을 그사람의 이미지로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또한 보이는 이미지가 강렬한 사람일수록 그에 반대되는 구석역시 강렬하기 마련이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매우 '위악적'이다. '위악적'이라는 말은 악한 것을 부러 더 강조한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그만큼 그런 상황, 그런 인물들에게서 그가 느끼는 감정의 진폭이 다른 이들의 그것보다 더 강렬하다는 의미다.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위악스럽다는 것은 그만큼 예민하단 반증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예민한 사람들이 모두 김기덕처럼 위악스러운 표현방식을 선택하진 않는다. 대부분의 예민한 인종들이 선택하는 길은 사실 '냉소'다. 영화판에서 그런 인종을 꼽으라면 단연 홍상수다. 어떻게 느낄지 모르지만 홍상수의 영화역시 웃음이란 외피를 뒤집어 쓰고 있지만 김기덕의 영화만큼이나 두 눈 똑바로 뜨고 바라보기 거북살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물론 꽤 많은 이들은 홍상수의 영화를 보며 아무런 부담없이 웃기도 한다. 적어도 그들중 90%정도는 '누워서 침뱉는다'는 말의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나머지 10%정도는 웃어도 당당한 이들이고.
아무튼 모든 예민한 인종들중에서 몇몇이 '냉소'가 아닌 다른 길, 즉 김기덕처럼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알다시피 세상엔 예민한 인간들의 약 1,000,000배 이상은 족히 되는 걸로 추정되는 무딘 인간들이 살고 있다. 그리고 그들에겐 솔직함보단 알량한 교양이란 걸로 무장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짐짓 점잖고 교양있는 척 김기덕의 위악스러움을 나무란다. 실제로 그들이 김기덕 감독이 그토록 격렬하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참혹한 상황들을 만들어 내는데 직간접적으로 공헌하는 인간들이란 사실은 가볍게 무시한 채 말이다.
김기덕 감독이 인터뷰 자리에서 그토록 저주에 가까운 독설을 토해낸 이유다. 그러나 김기덕 역시 알고 있다. 그가 아무리 저주를 퍼부어도 결국 그의 영화적 자양분은 바로 이 시간과 공간에서 만들어진 것이고 이 곳에서 가장 잘 이해될 수밖에 없는 것이란 너무나도 명확한 비극을. 그래서 그의 저주와 독설이 내겐 투정으로 들리는 이유다.
김기덕이 이렇게까지 해도 사람들은 그의 영화를 보지 않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기덕의 선택은 옳은 것일 수 있다. 난 그가 어떤 샌택을 하든 그를 지지할 것이다. 무디고 무관심하여 일상 자체가 위선적일 수 밖에 없는 백만명의 찌질이들보다는 그들이 보이는 위선에 치를 떨면서 위악적이 된 한 명의 김기덕이 더 가치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