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어스가 '또' 졌다. 매일같이 승부를 갈라야 하는 세계에선 패배는 낯선 일이 아니다. 패배를 통해 배우고 승리를 통해 자신감을 고양시키면 그만인 것이 승부의 세계니까. 그래도 굳이 강조하는 이유는 하필이면 '퀸즈 데이'였기 때문이다. 올 해 들어 여성 관객들을 위한 행사의 하나로 신설된 '퀸즈 데이'에는 여성 관객들을 위한 각종 이벤트가 벌어진다. 하지만 경기장에 가지 않거나, 혹은 못간 이들에게 이 날은 야구장에 서 핑크 곰들, 혹은 핑크 돼지들이 뛰어 다니는 걸 볼 수 있는 날이다.
안 그럴 것 같지만 요즘도 미취학 아동부터 꽃분홍은 여자의 색이요, 파랑은 남자의 색이란 도통 출처를 알 수 없는 편견을 굳게 믿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오래된 습속에 젖어 살아온 데다가 땀방울흘려가며 일하는 블루칼라 직종인 야구 선수들에게 어느 날 갑자기 '핑크색 유니폼을 입도록 하라!'는 결정은 그야말로 하늘이 쪼개지는 듯한 아득한 느낌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야구도 힘든데 어찌 하여 이런 시련까지 주시나요 싶었을 게다. 오죽 했으면 두목곰인 김동주는 첫번째 퀸즈데이가 벌어지던 날 '아플 예정'이라고 까지 했겠는가.
그 때문일까? 퀸즈 데이 경기는 현재까지 세 번 모두 패배했다. 사실 어쩌다 보니, 혹은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어서 패배한 것이지 꼭 분홍 유니폼때문은 아니다. 게다가 65경기정도 진행된 상황에서 3패라는 것이 그렇게 상징적인 숫자가 되기엔 표본 역시 부족하다. 게다가 올 해 프로야구 팀들은 기이할 정도로 홈구장에서의 승률이 낮다. 그러니 저주나 징크스라고 부르기엔 아직 미흡하다. 그러나 승리와 패배가 극명하게 나뉘는 판일수록 징크스니 저주니 하는 말이 늘상 따라붙게 마련이며, 또 그런 게 있기에 스포쓰가 재미있는 것이다. 보스턴 레드삭스 팬들에게 '밤비노의 저주'는 월드 시리즈 우승에 대한 열망을 더욱 간절하게 만든 요소였던 것이 분명한 것처럼.
그런데 공교롭게도 베어스가 퀸즈 데이 행사를 시작하고 3전 3패를 당한 이후로 웬지 핑크 유니폼에 대한 떨떠름한 시선들이 늘어나고 있다. 아직은 극소수지만 핑크 유니폼을 없애야 하지 않느냐는 의견도 나온다. 하지만 난 그 견해를 극렬히 반대한다.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유니폼이 생각보다 아주 예쁘기 때문이다. 골수 팬이 많기로 유명한 베어스지만 아직까지 길거리에서 베어스의 유니폼을 자랑스레 입고 다니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사실 난 아예 없다. 왜 그럴까? 뽀대가 안 나오기 때문이란 단순한 이유다.
야구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양키스와 레드 삭스의 야구 모자나 그들의 마크가 새겨진 옷을 입고 다닌다. 하지만 베어스나 트윈스의 유니폼을 입고 다니는 이들은 없다. 그 네들보다 역사가 짧아서 일 수도 있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뽀대'다. 그러나 이 무미건조하고 멋대가리없으며 심지어 일관성조차 없는 유니폼 계에 일대 파란을 일으킨 것이 바로 베어스의 핑크 유니폼이다. 왜 이런 소릴 하는가 하면 야구장 근처가 아닌 동네에서 심지어 강남역 길거리 한 복판에서 베어스의 핑크 유니폼을 입고 활보하는 처자들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야구장만이 아니라 일상적으로도 입을만 하다는 판단이 들었다는 증거다. 그것도 패션에 유난히 민감한 10대, 20대 처자들이 말이다.
이건 의미가 남다르다. 비록 프로야구판에도 여성들의 참여도가 높아지고 있다지만 아직도 스포쓰 노가다판은 남성들의 전유물이다. 남성들은 자신이 응원하는 팀이란 이유 하나로도 개나 줘버려야할 유니폼도 기꺼이 입을 수 있는 존재들이다. 반면 여성들은 그리 단순한 존재들이 아니다. 요구사항이 초끔 까다롭다. 좋아하는 팀의 유니폼이지만 디자인이나 색깔이 이상하면 외면한다. 그런 여성들이 인정할 정도라면 일단 매우 성공적이라고 봐야 한다. 물론 아직까지 그 유니폼을 입고 백주 대낮에 강남역이나 명동을 활보하는 남성들을 보지 못 했다는 점에서 약간의 하자가 있긴 하지만. - 내가 먼저 시도해 볼까?
난 국내 프로야구 팬들이 더 늘어나길 바란다. 그나마 가장 많은 팬층을 확보하고 있기에 꼴통같은 유인촌이가 장관으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총재 선출까지 자율적으로 해내지 않았나. 사랑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항상 선순환을 통한 발전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그리고 프로 스포쓰에서 그 사람들은 결국 팬이다. 그리고 그 팬들이 자랑스럽게, 혹은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수 있는 유니폼이 등장하고 있다는 건 지극히 초보적인 수준이지만 구단의 노력과 팬들의 교감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발전하고 있다는 증거다.
어차피 세상 그렇게 발전하는 거 아닌가? 다소 느릴진 모르지만...
급히 먹는 밥이 체한다는 말도 있으니 이왕이면 좋은 쪽으로 해석을...
핑크의 저주니 여성에 대한 역차별이니 하는 각종 루머들이 퍼지지만 그래도 난 핑크 유니폼이 좋다.
게다가 심지어 선수들이 입어도 꽤 잘 어울리기까지 한다. 최준석과 김동주조차 귀여워 보이지 않나.
이젠 마초보다는 이쁘고 귀여운 남자가 대세인 거다.
아니면 압도적으로 마초스럽던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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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남은 유일한 길은 후자뿐인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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