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작품의 주관성
예술 작품의 영원성을 말하는 이들이 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난 동의도 반대도 아닌 입장이다. 왜 그런가 하면 그 어떤 사람이 특정한 예술작품의 어떤 측면을 거론하며 '예술 작품의 영원성'을 거론하는가에 따라서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반쯤은 질문에 가까운 답을 던질 경우 돌아오는 답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또 다른 답을 하는 일은 참으로 막막해진다. 그러니 예를 한 번 들어보자.
ABBA란 그룹이 있다. 혼성 4인조다. 스웨덴 출신이고 한때 볼보와 함께 스웨덴의 2대 수출품이란 소리까지 들었다. 아마도 전 세계적으로 가장 성공한 그룹중 하나일 텐데 문제는 그들의 음악이 그토록 찬사를 받을만 한가 하는 의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아바의 음악을 싫어한다는 말은 아니다. 적어도 대중성이란 면에서만큼은 가장 완성도가 높다고 봐야 한다. 그렇지만 다른 면에서라면? 이를 테면 세계 음악계의 일대 전환을 불러올만한 새로운 어떤 것을 보여주었는가라고 질문한다면? 글쎄? 일단 난 그런 건 없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또 다른 질문 하나. '몽타쥬'란 영화 편집기법을 창안해낸 이는 러시아의 에이젠슈타인 감독이다. 그리고 지금도 많은 영화관련 서적에서 몽타쥬와 관련된 예를 들기 위해 자주 인용하는 영화가 바로 에이젠슈타인의 영화 '전함 포템킨'이다. 실제로 그 책들에 나온 내용을 대충 훑어보고 영화를 보면 책에서 보았던 장면이 나올 때마다 '오! 오! 과연 그렇군!'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하지만 솔직히 영화는 정말로 재미없었다. 혁명적인 새로움이지만 그것도 흔해져 버리면 그저 그런 것일 뿐이니까.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란 영화가 있다. 우리에겐 이상할 정도로 거의 포르노그라피 수준의 영화라고 알려져 있지만 영화 평론가들은 입이 마르도록 극찬하는 영화중의 하나다. 나도 봤다. 그런데 내 감상이란 건 '포르노도 아니고 엄청난 영화도 아닌' 그저 그런 지루한 영화였다. 뭔가 절박해 보이려고 노력하는데 난 별로 공감할 수가 없었다. 뭐 지금 다시 보라면 어떤 느낌이 들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라고 서두를 시작하는 것은 대체로 구체적인 개인의 생각, 취향을 탈각시킨다는 의미다. 물론 그런 작업도 분명히 필요하고 중요하다. 반면 어떤 개인이 특정한 예술작품이나 예술가를 지칭하면서 '영원한 예술 작품 혹은 예술가'라 부르는 것은 개인적인 생각과 취향을 일반화시키는 행위다. 물론 이 경우에도 '어떤 점에서 일반화가 가능한가'를 설명한다면 타인도 납득할만한 최소한의 조건은 갖춘 셈이다.
그런데 때로 사람들은 그 설명으로 또 다른 주관성을 제시한다. 이를 테면 '영원한 사랑을 다루었다'는 식인데 솔직히 이렇게 나오면 많이 곤란하다. 사춘기 소녀가 사랑을 바라보는 관점과 시집 못 가서 명절마다 들들 볶이는 노처녀의 그것이 같을까? 어떤 예술가와 예술 작품에 대해서 감탄하고 흥분하고 즐거워하고 찬양하는 행위는 아주 바람직하고 긍정적인 행위다. 예술적 경외감에 대한 경험이 많은 사람의 감성이 더 풍요롭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니까. 다만 그 모든 예술적 경외감이란 것 역시 주관성의 영역이란 것도 잊지 않았으면 싶다.
뭐 내 생각은 이렇지만 세상이 그렇게 굴러가는 게 아니다 보니 나도 수시로 낚이긴 한다. 이번엔 안 물테다라고 별러보기도 하지만 그래봐야 고작 몇 번 피할 수 있을 뿐 이다. 그래서 세상 재미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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