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ki

사소한 반론

The Skeptic 2013. 1. 6. 04:27

난 듀나를 좋아한다. 그가 처음 인터넷에 글을 올리기 시작하고 그것이 인터넷 사용자들사이에서 화제가 되기 시작했던 무렵부터 그의 글을 좋아했다. 때론 같은 영화를 놓고 나와 비슷한 시각을 피력하는 것을 보며 좋아하기도 했고 내가 놓친 부분들을 드러내주는 것을 보며 무릎을 탁 칠 정도로 감탄하기도 했다. 이를 테면 그는 나에게 상당한 자극을 주는 존재였던 셈이다. 그런데 이번에 그의 글에 대한 사소한 반론을 펴고자 한다. 


그의 글 '<내가 살인범이다>가 반복한 <아저씨>의 실수'에 대해서다. 만약 이 글에 '내가 살인범이다'와 '아저씨'라는 두 영화만 등장했다면 난 충분히 동의해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악마를 보았다'가 등장했다는 점이다. 그것도 '복수의 실패'라는 점을 피력하였다. 물론 난 그 '복수의 실패'라는 부분에 대해선 동의한다. 세 영화 모두 어떤 형태로든 복수가 실패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맞다. 그런데 한 가지 차이가 존재한다. 


앞선 영화 '내가 살인범이다'나 '아저씨'의 경우엔 복수, 그것도 제대로 된 복수가 영화의 최종적인 목적이다. 그런데 '악마를 보았다'는 그 반대의 지점을 가리키고 있다. 즉 '복수는 실패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악마를 보았다'라는 영화의 목적인 것이다. 애시당초 이 영화와 앞선 두 영화가 지향하는 방향자체가 다르다. 그렇게 보면 앞선 두 영화는 각종 윤리적 질문이나 사회구조적 해결책이란 일반적으로 공인된 해소방식이 아니라 지극히 사적인 형태의 복수 혹은 꼼수일지언정 매우 신선한 반전을 통해 관객들로 하여금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도록 만들었어야 했다. 반면 '악마를 보았다'의 경우엔 정확히 그 반대 방향을 지향하기 때문에 영화의 진행과 결말 부분이 그렇게 배치되는 것도 아니다. 즉 결론이 허약해보일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허술한 건 아니다. 


듀나의 지적처럼 복수가 성공하기 위해선 복수를 하려는 대상이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가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대상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부숴버리는 것이 복수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화 아저씨에선 그런 대상이 꽤 뚜렸하게 드러난다. 그 영화속의 악인들은 각종 악행을 일삼는 존재들이지만 악행을 저지르는 목표 역시 분명한 존재들이고 그 목표야말로 그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악행을 통해 얻은 것들로 나름 풍족하고 안락한 삶을 누리는 것이 그들의 최종 목표인 한에서 보자면 그들의 목숨을 빼앗는 것도 복수의 한 방법이 될 순 있다. 단지 듀나가 실패한 복수라고 지적하는 것은 그 과정들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복수를 통해 악인들이 좌절하는 대목들이 자세히 드러나지 않은 채 너무 단순하게 최종적인 단계로 워프해 버렸기 때문이다.(주1)


반면 '악마를 보았다'의 경우엔 그런 대상이 매우 모호하다. 즉 악인은 존재하는데 그를 이해할 방법이 없다. 물론 여기서 '이해할 방법이 없다'라고 단정하는 것은 나의 지나친 주관적 의견일 수도 있다. 누군가는 '악마를 보았다'에 등장하는 악인을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런데 적어도 내가 보기엔 '악마를 보았다'라는 영화를 만든 이는 그것이 무엇인지 제시해주기보다는 의도적으로 배제해버리는 선택을 한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되면 듀나가 지적한 부분, 즉 악인이 어떤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가를 알아차릴 도리가 없다. 그리고 아주 당연하게도 듀나의 지적과는 달리 복수를 성공시킬 방법도 없다. 


이 영화의 제목이 '악마를 보았다'인 것도 실은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라고 난 본다. 우리는 아주 쉽게 악마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정작 악마를 직접 본 사람은 없다. 때문에 우리가 악마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경우에도 그 단어가 가지고 있는 뜻은 천차만별이다. 즉 영화속의 악마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등장한다. 즉 우리가 악마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경우 그 단어가 가지는 의미들중 상당 부분은 '이해할 수 없음'이란 의미를 갖는다. 누가 봐도 악행인데 대체 왜 그런 행위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점에서 악마란 단어의 의미가 성립하는 셈이다. 


그리고 그건 영화 속에서 복수를 실행하는 이에게도 공히 적용되는 바다. 그는 악인을 이해하고 그에 합당한 수준의 복수를 행하고 있노라고 생각하지만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그것이 복수로서의 의미를 결여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결국 듀나의 지적처럼 제 아무리 공감능력과 상상력을 발휘한다고 해도 이해할 수 없는 존재들인 경우엔 사적인 복수든 공적인 수준에서의 처벌 혹은 단죄이든 복수로서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영화 '악마를 보았다'는 그것을 말하려는 것이고 사실 대부분의 현실도 그런 양상을 보인다. 


듀나의 글이 지적하는 바에 대해서 대체로 동의하는 바지만 '악마를 보았다'를 예로 든 것은 아무래도 부적절해 보인다. 



주1)

물론 이 부분에 대해서 이해하려면 이해하지 못할 것은 없다. 만약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여자 아이가 납치되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절체절명의 상황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니라면 차근차근 제대로 된 복수를 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상황이 그렇다고 그 일들을 순차적으로 해결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수는 없다는 거다. 이야기 전개상 복수에 집중하다보면 아이를 구출할 시간적 여유가 모자라고 아이를 먼저 구출하고 복수를 감행하는 것으로 만들면 액션영화가 갑자기 복수극이 되는 묘한 상황이 벌어진다. 이런 경우엔 차라리 납치된 아이마저 죽고 그 때문에 본격적으로 액션과 복수가 등장하는 것이 스토리 전개상 더 나은 선택이었을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