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쓴 글에서 '동조자', 그것도 첫번째 동조자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즉 어떤 일이든 가장 중요한 것은 제일 먼저 행동에 나서는 사람이지만 그만큼 중요한 사람이 바로 첫번째 동조자라는 것이다.
하늘 아래 완전히 새로운 것이 없다는 말에 의거하자면 가장 먼저 행동에 나서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가 가장 먼저 그 행동에 걸맞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은 아니라는 점은 명확하다. 다른 많은 이들중에도 그와 같은 혹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직접 행동으로 나서지 않는 이유는 대부분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직접 행동에 나서는 이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사실 현실에선 그걸로는 아직 부족하다. 우리는 수많은 선구자들이 아무런 동의나 동조를 얻지 못한 가운데 다수의 반대파들에 의해 쓸쓸히 사라지는 사례를 많이 알고 있으니까. 제 아무리 많은 이들의 동조를 얻는 행동이라고 해도 그들이 '부담없이' 직접 행동으로 나서기 위해선 선구자와 동조자가 거의 동시에 필요한 법이다.
쿠바 혁명의 상징인 피델 카스트로에게 체 게바라라는 절대적 동조자이자 동지가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독자적 정치 세력화를 모색중인 안철수를 바라보는 내 시각도 그와 비슷하다. 물론 안철수를 바라보는 세간의 시선들이 적극적인 동조인지 아니면 일시적인 정치적 결합인지 그 속내까진 알 수 없다. 그러나 어떤 의미로든 안철수의 정치적 영향력을 높게 평가하고 현 상황에서 그것이 필요하다고 보는 사람이라면 적극적 동조자로서 나설 필요가 있다. 단순히 '도와줘서 남좋은 일만 시킨다'라고 생각한다면, 그러니까 동조의 목적이 정치 변화와 발전이 아니라 권력 그 자체라면 굳이 나설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냥 나중에 줄만 잘 서면 그만이니까. 그러나 그런 목적이 아니라면 적극적 동조로 나서줄 필요가 있다.
피 위 리즈, 진 허마스키. 낯선 이름들일 수 있다. 영화 <42>를 본 사람이라면 알 수도 있을 것이고 인종차별과 미국 프로야구사이의 역사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면 익히 알고 있는 이름일 것이다. 미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초의 흑인 선수인 재키 로빈슨을 기리기 위해 유일하게 전 구단에서 영구결번이 된 번호가 바로 42번이다. 프로야구에서 인종차별 문제의 선구자였던 재키 로빈슨. 그러나 그것이 오로지 그 혼자만의 힘은 아니었다.
원정경기에서 상대팀 팬들에게 엄청난 야유를 받고 있던 재키 로빈슨에게 다가가 어깨동무를 하고 농담을 나누며 인종차별에 반대한다는 메시지를 던져줌으로서 상대팀 팬들을 죽음과 같은 침묵에 빠지게 만들었던 이가 바로 백인인 피 위 리즈다. 재키 로빈슨이 인종차별주의자들의 갖은 협박에 시달리자 '우리도 재키와 같은 등번호를 달고 경기에 나서면 어떨까?'라는 제안을 했던 이가 진 허마스키다. 그리고 그 제안은 지금도 이어져 내려와 재키 로빈슨이 최초로 미국 프로야구 경기장에 섰던 4월 15일이면 모든 선수가 42번 등번호를 달고 뛴다.
재키 로빈슨은 미국 프로야구에서 최초로 흑인에 대한 차별을 깼던 선구자적 인물이다. 그러나 만약 그에게 피 위 리즈나 진 허마스키같은 동조자들이 없었더라면 과연 미국 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장면들과 역사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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