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은 늘 시궁창

함익병의 실용주의 코스프레.

The Skeptic 2014. 3. 11. 00:31

사람에겐 저마다 상황에 따른 목표라는 것이 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존재다. 그 목표가 단순히 본능적인 욕구들, 먹고 자고  싸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이 모여서 살아가는 사회가 온갖 상징과 그 상징을 매개로 하는 물질적 매개체들(으를테면 종이쪼가리에 불과하지만 그것보다는 훨씬 값어치있다고 여겨지는 화폐같은 것들)을 통해 연결된다는 점에서 보자면 먹고 자고 싸는 행위조차 동물들처럼 단순하진 않다. 


그래서 인간은 모든 행위는 목표를 이루기 위한 행위지만 역시 그것을 이루기 위해선 앞서 설명한 각종 상징적이며 물질적인 매게체들을 통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사실 인간이 만들어낸 문명은 모두 다 그런 점에서 일종의 매개체, 즉 수단이고 방법으로 존재한다고 보면 된다. 재미있는 건 우리가 흔히 둥글게 말하는 목표들이나 방법, 수단들이 실제로 섬세하게 파고들어 보면 그렇게 단순하게 언급할 수 없는 것들이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가재잡는데 도끼들고 장작패는데 어망들고 길을 나서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의미다. 


그래서 늘상 모든 문제는 구체적으로 파악해야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에게 '5분 줄께'라고 말하면 누구나 '너무 적다'라고 말하지만 시계를 들고 5분이란 시간을 헤아려보라고 의외로 꽤 길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이야기로 서두를 여는 이유는 함익병이가 이상한 소리를 해서 그렇다. 그렇다고 그의 주장이 그렇게 특출난 것도 아니다. 그런 수준의 생각을 하는 이들은 많다. 심지어 보수가 아니라 스스로를 진보에 가깝다고 말하는 이들중에도 꽤 된다. 이건 매우 난감한 상황인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를 따져보면 의외로 답은 단순하게 드러난다. 이들의 공통점은 스스로 '실용주의자'라는 것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물론 앞서 언급한 '구체성'의 영역으로 들어가보면 이들이 실용주의자라는 것은 허튼 소리라는 것이 쉽게 드러나지만 말이다. 


'잘 살기 위해서라면 독재인들 어떠냐?'라는 발언은 자주 언급하는 것처럼 일종의 결과론에 불과하다. 결과로 모든 것을 판가름하는 행위는 과정상의 문제를 모두 덮어 버리는 우를 범하게 된다. 적어도 스스로 실용주의자라고 말하는 사람이라면 결과에 몾지않게 과정에 신경을 쓸 것이다. 왜? 과정이 탄탄치 못 해도 우연찮게 결과가 좋을 수는 있다. 문제는 그런 상황이 연거푸 벌어지는 행운은 잘 벌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런 상황에서 과정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는다면, 이른바 검증을 하지 못 한다면 성공보다는 실패할 확률이 더 높아질 것이고 이는 '요행을 바라는 한탕주의자'의 자세지 결코 '실용주의자'의 자세가 아니기 때문이다. 


심지어 나름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그런 검증 과정에 대해서 이토록 몰상식한 발언을 한다는 건 더더욱 이해하기 힘들다. 의술은 인간의 목숨을 다루는 것이다. 당연히 의술의 연구나 결과물들은 그 모든 과정이 안전성과 안정성을 위해 몇 번의 검증과정을 거치는 것이 보통이다. 즉 일반 사람들보다 몇 배는 더 조심스럽고 지겨울 정도로 검증 과정을 거치는 훈련을 받은 직업인이 어째서 더 많은 이들의 목숨과 삶이 걸린 정치 문제에 대해선 '요행을 바라는 한탕주의자'와 같은 자세를 취하는가 하는 것이다. 


두번째로 문제가 되는 건 앞서 언급한 '목표의 구체성과 그에 따른 도구의 적절성'여부다. 개발독재 시절에 경제발전을 이룬 사실을 부정하진 않겠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건 우리가 그 시절을 살고 있는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 시절에 대한 검증을 무시한 댓가로 우리는 여전히 21세기에 살면서도 1960년대식 개발 독재라는 상대적으로 퇴행적인 인식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누차에 걸쳐 강조하고 이미 수많은 언론 매체들, 심지어 극우 매체들까지도 공히 인정하는 것처럼 지난 죄박이 시절부터 지금까지 개발독재식 경제 발전 유인책을 동원했지만 성과를 거둔 것은 거의 없다. 왜? 이유는 단순하다. 개발독재를 통해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는 환경이란 것이 있고 그것이 별 효과를 거두지 못 하는 상황이란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자본주의 국가들이 그런 시기를 모두 겪었고 결국 저성장의 시기를 받아 들이고 그 시기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한 것이 최근의 자본주의의 역사다. 그 과정에서 그나마 성공한 것이 유럽이라면 가장 실패한 곳이 바로 미국일 것이다. 


여기서 질문. 그렇다면 과연 지금 우리는 어떤 시기에 살고 있으며 어떤 현실적 목표를 갖고 있어야 하겠는가? 죄박이 시절 수많은 경제관료들과 경제학자를 가장한 정치꾼들이 주장한 이른바 '트리클 다운 효과'는 가장 먼저 물을 받는 최상위 층의 물컵이 욕심때문에 한없이 커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채 그 목숨을 다 했다. 그리고 21세기 초반 경제위기에 직면한 미국이 벌인 부채로 경제살리기란 시도는 금융시장을 시작으로 비극적인 파국을 맞이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이 났다. 자본과 노동력의 자유로운 이동이란 이슈조차 최소한의 산업적 기반을 마련하지 못한 국가에겐 그저 착취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과정이란 것이 증명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과연 1970년대에 시작된 개발독재란 형식이 지금도 유효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구체적인 질문이고 자칭 실용주의자라면 당연히 던져야할 질문이다. 그 질문으로부터 시작해서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그리고 '과연 그 목표를 위해 어떤 방법, 수단을 동원할 것인가'란 구체적인 질문들이 나오는 것이다. 


함익병이 의사라서 경제, 그리고 그 경제와 뗄래야 뗄 수 없는 정치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그런 발언을 했을 수도 있다. 그런 점에 대해선 어느 정도 인정해줄 수 있다. 의사라고 모든 걸 남들보다 더 잘 아는 그런 사람은 아니란 건 당연한 사실이니까. 그런데 '잘 살기 위해서라면 독재인들 무슨 상관인가?'라는 수준의 발언은 그 자체로 문제가 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 발언은 은연중에 스스로를 실용주의자인 것처럼 포장하는 화법인데 글 전반에 걸쳐 지적했지만 이건 실용주의자의 자세가 아니라 근거없는 뜬 소문에 이끌려 묻지마 투자를 하는 한탕주의자의 인식이기 때문이다. 


함익병이란 인물을 거론하긴 했지만 단순히 그를 비난하기 위해서 이 글을 쓰는 건 아니다. 어쩌다 보니 이번에 함익병이 이런 이슈로 화제가 되었을 뿐이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건 사실 이 나라엔 이런 류의 가짜 실용주의자들이 넘쳐난다는 점 때문이다. 주의할 것은 구체성에 근거하지 않은 실용주의는 가짜라는 것, 그리고 과정에 대한 검증을 도외시하는 결과론은 로또를 사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는 행위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