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수좋은 날

[영화] 회사원 - 진부한, 그래서 설득력있는

The Skeptic 2014. 10. 29. 02:30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언어란 그 의미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이미 수십년전부터 철학과 인문학에서 수없이 언급해온 바고 심지어 기호학이란 학문을 통해 상세하게 알려지기도 했다. 우리는 하나의 단어를 하나의 대상 혹은 상황에 빗대어 사용한다고 믿고 있지만 정작 그 대상이나 상황이 동일한 것인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통 자체에 큰 무리는 없다. 고정된 대상이나 상황을 적시하진 않지만 그와 비슷한 것들은 '아주' 느슨한 형태로 공유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이런 상황은 지극히 일상적인 대화인 경우 무리없이 통용되는 것일 뿐 지극히 구체적인 대상이나 상황에 대해서 다룰 경우엔 이런 식의 '아주' 느슨한 공유라는 것을 전제할 순 없다. 그것은 모든 오류나 실수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주로 다루는 분야들, 법이나 각종 행정절차들, 학문같은 경우엔 '아주 느슨한 공유'가 오히려 장애물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무튼 언어란 건 그런 식으로 통용되는 것이 보통이다. 때문에 같은 단어라고 하더라도 그 단어가 사용된 맥락이나 상황에 따라 의미는 달라지게 마련이다. '진부하다'는 단어 역시 마찬가지다. '진부하다'는 건 대체로 다분히 부정적인 뉘앙스, '따분하다'든지 '식상하다'든지 하는 따위의 의미를 담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걸 뒤집어 말하면 그만큼 대중적인 의미, 현상, 상황이라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내가 영화 '회사원'을 '진부하다'라고 말하는 것도 후자의 의미다. 이미 영화 상영전부터 어떤 상황이 담길 것이라다는 것이 알려진 이후로 이 영화는 '진부함'을 피해가긴 어려웠다. 그리고 역시나 영화에서 묘사되는 각종 상황들, 대사들도 그런 것들을 담고 있다. 쉽게 말하면 이 영화에서 청부살인을 하는 회사와 그 일을 하는 사람이란 설정을 바꾼다고 해도 실제로 평범한 직장인들의 그것과 거의 대동소이하며 영화의 내용이나 메시지도 달라질 것이 없다. 


오히려 청부살인을 하는 회사와 그 일을 하는 이들이란 극단적 설정은 평범한 일상이 내포하고 있는 일상적인 폭력성과 그 폭력이 어떤 합리화 과정을 거쳐 무관심의 대상으로 전락하는가를 드러내기 위한 장치인 것이다. '내가 좋아서 혹은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라 회사가 시켜서 하는 것일 뿐이다'라든지 '좋든 싫든 그냥 일이니까 한다'는 식의 평범한 대사들은 평범한 일상에선 전혀 이상해보이지 않지만 '그' 일이 살인인 경우엔 분명히 느낌이 달라진다. 그 부조리함, 그것이 이 영화의 핵심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확실히 진부하다. 거의 모든 영화적 장치들은 누가 봐도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 것인지 확실해 보이며 사실 예상을 빗나가는 상황도 전혀 벌어지지 않는다. 모든 것이 예측가능하다는 건 분명 진부하다. 그러나 이미 앞에서 언급했듯이 진부하다는 건 이미 잘 알고 있다는 것이고 사실 그 때문에 비록 부조리한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평범한 일상과 영화 속 부조리한 상황의 비교를 통해 드러나는 영화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건 분명한 미덕이다. 


영화 마지막 장면 즈음에 회사에서 벌어지는 총격전 장면, 총격전이 마무리되고 마지막으로 살아 남아서 떨고 있는 직원에게 주인공이 던지는 대사. 


"퇴근해."


비록 회사안에서 엄청난 총격전이 벌어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어쨌든 회사가 망했으니 퇴근하라는 그 대사 한 마디가 주는 부조리한 느낌은 사실 꽤나 인상적이다. 그리고 영화내내 그런 상황은 반복된다. 사실 조금만 더 신경을 썼더라면 단순한 부조리함을 넘어 느와르 영화처럼 서늘함마저 줄 수 있었을 텐데 조금 아쉽다는 이야기도 나오긴 했지만 사실 느와르 영화에 등장하는 장면, 상황, 상징들이 나오긴 하지만 결코 느와르 영화를 지향한 건 아니다. 오히려 그런 쪽에 무게를 두었다면 더 이상해졌을 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너무나 익숙한 상황설정과 스토리 라인은 진부했지만 그 익숙한 진부함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소재를 통해 드러남으로서 느껴지는 부조리함을 잘 보여주었다는 점에선 높은 평가를 받을 만 하다. 그리고 그 높은 평가의 정점엔 이미 앞에서 한 차례 언급한 <평범한 일상이 내포하고 있는 일상적인 폭력성과 그 폭력이 어떤 합리화 과정을 거쳐 무관심의 대상으로 전락하는가> 를 잘 보여주었다는 점일 게다. 


반면 스토리 라인 전개를 위해 등장하는 소소한 에피소드들도 진부함을 넘어서지 못 했다는 점은 꽤나 큰 감점 요인이다. 물론 일반적으로 그런 소소한 에피소드들이 영화의 스토리에서 그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감점요인이 되는 이유는 두 가지, 영화외적인 문제와 내적인 문제로 볼 수 있는데 외적인 문제는 그런 진부하고 클리셰에 충실해야 할 장면들이 매끄럽지 못 하다는 걸 사전작업단계에서 아무도 못 알아차렸다는 점일 게다. 몇몇 장면들은 거의 견습작가 수준의 장면구성과 대사들이 등장해서 낯부끄러울 지경인데도 말이다. 


내적인 문제는 이 영화가 낯선 설정과 일숙한 일상을 뒤섞음으로서 일종의 부조리함을 드러내는 나름 탁월한 선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매끄럽지 못한 장면들이 등장함으로서 영화 전체의 분위기를 흐트려놓는다는 점이다. 스포츠 경기에 대한 일반 관중들의 극찬은 바로 '어떻게 시간이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해당 경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의미인데 이런 긴장된 분위기에서 맥이 탁 풀리게 만드는 건 어처구니없는 실수다. 불행히도 이 영화는 그런 실수를 저질렀다. 


사소한 듯 보이지만 사실 그게 잘 만든 영화와 그저 그런 영화, 못 만든 영화라는 차이를 만든다. 이 영화는 그저 그런 영화와 못 만든 영화라는 경계선에 서있다. - 그저 그런 영화라는 평가를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1년을 통틀어도 이른바 '잘 만든 영화'는 몇 편 안 되는 것이 보통이니까. 



p.s.

자주 느끼는 건데 우리 나라는 특이할 정도로 남자배우 복이 많은 나라같다. 그저 그렇고 그런 아이돌 배우로 끝날 것처럼 보였던 수많은 탤런트들이 성공적으로 배우로 성장하는 걸 보면 말이다. 그리고 이제 그 배우명단에 소지섭의 이름을 넣어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물론 그런 배우 한 명의 성공뒤엔 수많은 무명 배우들이 가려져 있을 테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경계선상에 이번 영화에 등장한 어린 남자배우도 서있는 것 같다. 그래도 배우가 되겠다는 생각이 있다면 최소한 발성연습은 좀 제대로 하고 등장하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싶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