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먹고 바람똥

공정사회

The Skeptic 2010. 8. 17. 02:19

공정사회

 

사실 많은 이들이 상식에 대해서 말할때 '하나의 정의/개념'을 전제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실상 상식에 대한 정의나 개념은 매우 다양하다. 나도 간혹 사람들과 대화할때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라는 말을 자우 사용하지만 나의 상식과 그의 상식이 같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다만> 내가 얼굴을 마주 하고 대화를 나누고 심지어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라'는 다소 무례한 언사를 부담없이 주워섬길 정도의 사람이라면 난생 처음 보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당연한 일이고 따라서 그 사람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라'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공정하다'는 말 역시 마찬가지다. 무엇이 공정한 것인가에 대한 판단은 사실 저마다 다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모든 상황에서 모든 판단이 다 인정받는 건 아니라는 거다. 즉 특정한 시대상황이나 혹은 특별한 어떤 순간엔 분명히 단 하나의 판단 혹은 비슷한 범주의 판단들이 정의로서 인정받는 것이다. 

 

모든 시간과 때는 각자 되돌릴 수 없고 비교불가능한 독특함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현재 남한에서 '공정하다'라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하는 걸까? 일단 현재 남한엔 이것과 관련하여 경계선이 확연하지 않고 느슨한 의미로 정의되는 두 개의 상식이 존재한다. 그 중 하나는 '누구나 무차별적으로 동등한 기회를 보장받아야 한다'는 것이고 '개개인의 실정에 맞게 차별적인 요소를 도입하는 것이 공정하다'는 것이 그 두번째다. 

 

대개 장년층 이상의 연령대에서 전자의 경향이 강하게 드러나고 연령대가 낮아질수록 후자가 더 광범위하게 받아 들여진다.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6.25전쟁이후 폐허가 된 나라사정때문에 당시엔 '차별적인 공정함'이란 것이 전혀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들 가난했기에 '거의 모든' 이들의 출발선이 동일했기 때문이다. 반면 급속한 산업화와 자본주의를 통해 축적된 자본의 차이가 뚜렸해지기 시작한 이후로 '모든 이들의 출발선이 결코 동일하지 않은 시대'가 도래했다. 그리고 그것을 체득하기 시작한 세대부터 후자의 정의가 옳은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것이다.

 

구조가 의식을 지배한다는 점에서 볼때 이는 당연한 현상이다. 그리고 대다수 인간들의 의식은 점진적으로 계속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발전을 멈춘다는 점에서 볼때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즉 상황과 구조는 계속 변하지만 일단 발전을 멈추어 버린 인간들의 의식은 변화된 상황과 구조를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과거에 머물 수 밖에 없다. 그들에게 공정함이란 개개인의 사정과는 상관없이 무차별적으로 동등한 기회가 부여되는 것이다. 영원히. 

 

재미있는 건 이런 일반론과는 전혀 다른 '공정함'을 말하는 이들이다. 주로 죄박이와 딴나라당, 각종 극우 파시스트 집단 나부랑이들에게서 이런 현상들이 보이는데 이런 거다. 그들은 대체로 '모든 이들에게 무차별적으로 동등한 기회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부자감세가 논쟁이 되었을때 '부자들 가슴에 대못박는 건 괜찮느냐?'는 얼토당토않은 헛소리를 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망교회 신도이신 강만수가 그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반면 공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선 '학생들의 능력의 차이에 맞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펼친다. 그리곤 초중고등학교 일제고사 부활과 서열화를 그 대안으로 제시하며 사실상 사교육 시장의 활성화를 조장한다. 

 

이들에겐 집단적이고 역사적인 의미의 상식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폐쇄적인 자기들만의 계급과 그 계급의 필요성과 이익에 따른 정치적인 선택만이 존재할 뿐이다. 죄박이 말이 앞뒤가 전혀 맞지 않으며 말과 행동이 하나도 일치하지 않을 수 밖에 없는 이유다. 내가 죄박이와 딴나라당, 그리고 극우 파시스트 집단들, 극우 언론사들, 가족지배형 대재벌이 떠드는 각종 수사학들을 전혀 신뢰하지 않는 이유다. 그들은 나라전체의 이익을 위한 정치집단이 아니라 사적인 이익을 위한 정치 자영업자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