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스의 상인

숫자의 감옥과 개구멍

The Skeptic 2010. 12. 6. 02:41

비는 내리고, 내일이면 날은 추워질 것이고, 그저 기다리기만하면 돌아올 따뜻한 봄날을 그리워 하며 올 겨울도 내복을 살까 말까를 고민하겠지. 그 고민이 조금 더 길어질 즈음이면 봄이 올 것이고. 

 

"무슨 일을 하고 싶거든 그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만 생각하라. 나머지는 잠시 잊도록 하라."

 

내게 딱 어울리는 말. 어렸을 땐 그저 좋은 말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나이가 들고보니 참으로 실감이 난다. 굳이 완벽주의자가 아니더라도 마음이 굳질 못 하거나 팔랑귀인 사람은 새로운 일에 쉽사리 착수하질 못 한다. 그런데 겁이 나서, 결정을 못 내려서라고 솔직하게 말하기보다는 엉뚱한 핑계를 대기 일쑤다. 이게 바로 '자기 합리화'고 결국 스스로를 속이는 행위다. 

 

세상 모든 일이 다 그렇듯이 아무리 열심히 준비를 하고 철저히 대비를 해도 빈틈은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세상사가 다 그러니 대충대충 준비하고 일단 시작하고 보자는 것도 멍청한 짓이긴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보다 더 멍청한 짓은 준비를 핑계로 시작조차 못 하는 것이 아닐까? 

 

내 비록 나이먹고 아직도 준비를 핑계로 많은 것을 시도조차 못 해보는 인생을 여전히 꾸득꾸득 구겨가며 살아가고 있지만 다른 이들, 특히 나이어린 친구들을 만나면 제발 나처럼 살지 말라고 말한다. 인생이 아름다운 건 결국 무언가 새로운 일을 해보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 때문이니까. 사실 인간은 게으르거나 무료한 것에 가장 취약하도록 만들어진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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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정치 이야기를 하면 조금 이상할지도 모르지만 바로 위와 같은 이유때문에 난 자본주의를 싫어하기도 한다. 어제 오늘 각 포탈 뉴스에 '노후대책'이란 소리가 또 등장했다. 노후의 기준이 언제일까? 돈이야기니 분명 퇴직 이후를 말하는 것이고 대체로 60세 초반일 것이다. 그리고 평균 연령이 남자 70, 여자 80이니 퇴직 이후 10년에서 20년간 필요한 비용이 8억정도라고 한다. 8억... 

 

남자가 20대 후반부터 일을 하기 시작해 60세 초반 무렵까지면 약 30년쯤 되는 시간이다.  현실적인 계산법은 아니지만 그냥 단순하게 나눗셈을 하면 1년에 거의 2천 5백만원 정도는 모아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2천 5백만원. 매달 200만원. 물론 이 8억이란 기준은 사실 전혀 현실적이지 않다. 외려 금융사들이 자기네 상품팔아먹기 위해 만들어낸 숫자놀음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사실 주변에 아는 선후배 동기들중 보험회사에 대니는 사람들이 내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이유기도 하다. 

 

그러나 전혀 현실적이진 않더라도 이렇게 구체적인 숫자로 제시되면 웬지 설득력이 생긴다. 대개의 사람들은 이 숫자의 의미를 따지려 들지 않으니까. 그리고 이 숫자들이 언론을 타고 여러 귀와 입사이를 돌다보면 진실인 것처럼 회자되게 마련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숫자의 노예가 된다. 그렇게 자본주의는 사람의 인생을 숫자로 간단하게 규정지어 버린다. 그렇게 하고 싶은 일이지만 돈이 되지 않는 일은 그저 '쓸데없는 일'로 치부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숫자의 감옥에 개구멍을 만들어 내는 인간들을 보면 참 부럽고 그 용기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