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사건은 이제 거의 양파 수준이 되어가는 중이다. 처음엔 국정원이 불법적인 선거개입을 한 사실에서 출발하였으나 NLL사건을 통해 드러난 것처럼 국가의 공적 기관이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의 이득을 위해 복종했다는 사실이 드러남으로서 단순한 월권 행위를 넘어 국정원의 존폐 문제마저 심각하게 고려해봐야 하는 수준에 이르고 말았다.
당연히 많은 이들이 그에 대한 대책을 촉구하고 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납득하기 힘든 주장들이 뒤섞여 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박근혜가 책임지라'는 주장이다. 일반적인 수준에서 보면 책임을 요구하는 것은 단순한 행위다. 단지 대통령이 직접 책임지라고 주장하는 건 조금 의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주장은 나름 설득력이 있다.
국정원이 불법적인 행동을 해가면서 부당한 이득을 안겨준 집단은 바로 새누리당이다. 불법적인 커넥션이 드러난 상황에서도 새누리당은 국정원은 감싸고 돌고 있다. 왜 그럴까? 국민들이 우스운 거다. 이런 중대한 잘못을 사주하고도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는 여전할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불행히도 사실 그렇게 생각할만도 하다. 아니면 국정원이 현재 상태를 유지함으로서 얻는 이득이 국민들을 무시함으로서 잃게 될 것보다 더 크다고 여기든지 말이다.
자세한 속사정까진 잘 모르겠다만 중요한 건 현재 새누리당은 이번에 드러난 국정원의 초법적인 행태에 대해서 단죄할 의사가 전혀 없다는 건 명확해 보인다. 그래서 대통령이 책임지라는 소리가 나오는 것일 수도 있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이야기고 내가 이해하기 힘들다고 말한 주장은 '대통령 직에서 스스로 물러나라'는 주장이다.
난 그게 가능한지 불가능한지 잘 모르겠고 사실 가능성을 따져보는 것조차도 무의미하다고 여긴다. 아마도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이들은 일종의 정권교체를 요구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김대중, 노무현 양 대통령의 집권 시기를 겪으면서 우리가 실감하게 된 사실은 단순한 정권교체만으로 세상이 좋아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특히 경제적인 분야에서 그렇다. 경제와 관련된 분야만큼은 야권이라고 해도 여권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물론 국정원 문제는 정치적인 사안이기 때문에 정권이 달라지면 다루는 수위가 엄청나게 달라질 수도 있다. 그러나 난 사실 회의적이다. 적어도 우리가 흔히 진보정당이라고 일컫는 곳,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정의당, 진보신당, 사회당, 녹색당에서 대통령이 나오고 이들이 국회까지 점령하고 있지 않은 이상 국정원을 근본적으로 쇄신할 수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는 편이다.
물론 땜빵이라고 해도 어느 수준까지 손을 대는가에 따라 결과물은 많이 달라질 것이고 이 차이는 단순히 단죄와 쇄신의 주체가 새누리당인가 민주당인가하는 차이만으로도 클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현 정치 체제하에선 그리 큰 차이는 없을 것이라는 게 내 판단이다. 그렇다면 좀 더 정치적인 접근을 해보자.
과거 김대중이나 노무현 대통령이 검찰 개혁을 시도했을 때를 상기해보자. 알다시피 거센 저항에 부딪쳤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사수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게다가 싸우는 상대도 명확했으며 이전부터 적대시해오던 사람이었다. 일말의 머뭇거림조차 필요없었다.
그런데 만약 박근혜가 직접 국정원을 손본다면 어떨까? 그들은 당황할 것이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사수하고 싶지만 정작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장해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이가 자신들을 단죄하러 나선다면? 이건 누가 봐도 난감한 상황이다. 과거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김영삼이 남한 군부의 핵심적인 정치 사조직이었던 하나회를 손봤을 때다. 사실 그 누구도 예상치 못 했던 일이고 덕택에 그 일은 별다른 저항없이 김영삼의 의지대로 마무리되었다.
물론 이 생각에도 분명한 한계는 있다. 박근혜가 나선다고 한들 과연 얼마나 손볼 수 있을 것인가? 박근혜가 근본적인 차원에서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있을까? 누가 봐도 그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 정국이 심란한데 굳이 외유를 나가는 것도 곤란한 상황을 피해보고자 하는 의도로 읽힐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박근혜의 의지에 대해선 의문부호가 따라 붙는다.
그러나 이미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사실상의 정권교체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이 그리 크지 않다고 보는 것이 내 판단이고 만약 그렇다면 국정원 사건에서 드러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차라리 박근혜가 국정원 쇄신에 나서도록 강제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이다.
p.s.
명확한 정치적 지향보다는 대중 야합에 치중하는 두 보수정당의 구도를 깨지 못한다면 불행히도 이런 난점들은 해소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난 정당정치를 중시하며 인물보다는 정당의 공약을 내세운 선거명부제가 필요하다고 본다. 그리고 같은 의미에서 지방자치 단체 선거에서 정당공천을 배제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반대하는 편이다.
정치적 지향을 퇴색시킨 채 치뤄지는 선거는 대부분 기득권층과 보수주의자들의 입맛대로 굴러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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