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를 내린다'는 건 그 대상이 아무리 하잘 것없는 것일지라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그런데다 이른바 주류도 아니고 공식화된 형식이나 틀을 갖춘 것도 아닌 것에 대해서 정의를 내린다는 건 다소 무모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차 강조하는 것처럼 이런 작업은 중요하다. 설령 그 작업의 결과물이 특정한 형태로 귀결되지 않더라도 이 과정을 통해 공론화를 겪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자체로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해보는 이야기다. 'B급정서' 최근 들어 주로 대중음악계에 부는 현상을 언급하면서 누군가가 'B급정서'라는 말을 붙였다. 그러니까 오렌지 캬라멜이나 크레용팝같은 이들을 언급하면서인데 그렇다면 그가 언급한 이른바 'B급정서'라는 단어가 이 경우에도 적절할까? 난 그렇지 않다고 본다. 그러니까 그가 생각하는 바 B급정서와 내가 생각하는 바 B급정서는 그 의미가 사뭇 다르다.
아마도 'B급 정서'라는 단어를 정의할 때도 가장 인용하기 좋은 것은 모든 예술장르의 근간이자 필수요소라고 할 문학분야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른바 문학계에서 B급으로 분류되는 것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처럼 무협지와 만화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B급과 이른바 A급 사이엔 무슨 차이가 있는 걸까?
A급들이 들으면 기분나쁠지 모르지만 가장 핵심적인 부분에선 별 차이없다. 즉 A급이나 B급이나 말하고자 하는 바, 주제의식같은 것은 큰 차이가 없다는 의미다. 단지 차이라면 그것을 어떤 형식을 빌어서 하는가 하는 것 뿐이다. 이 형식의 차이가 A급과 B급을 가르는 기준인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A급 소설을 열심히 읽고 어떤 진리같은 걸 얻을 수 있다면 B급 소설을 열심히 읽어도 마찬가지로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A급과 B급 사이엔 아무런 차이도 없다라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다. 내용이나 주제의식에서 별 차이가 없고 형식적인 차이와 장르적 차이만 존재할 뿐이지만 그 차이는 꽤 크다. 다소 엉뚱한 예지만 '맹모삼천지교'와 같은 차이가 있다. 공부를 잘 하기 위해선 개인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주변환경 역시 중요하다. A급과 B급의 형식적, 장르적 차이가 야기하는 다른 점은 바로 이런 분위기다. 무협소설이나 만화에도 정통 소설에 몾지않는 주제의식이 있지만 이들을 대하는 독자들의 태도는 대체로 사뭇 다르다. 심지어 B급으로 분류되는 창작물의 경우 창작자들의 태도도 A급과 사뭇 다른 경우가 많다.
비록 주제의식은 대동소이할지 모르지만 그 창작물을 만들어 내는 창작자들과 그것을 접하는 독자들의 태도가 다르다는 걸 뒤집어 말하면 A급의 경우는 주제의식에 도달할 가능성이 크지만 B급의 경우는 그것이 어려울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건 형식의 차이가 만들어낸 꽤 중요한 차이고 일반적으로 B급과 B급 정서가 A급의 그것에 비해 과소평가되는 이유기도 하다.
'똑같은 주제를 다루는데 그런 형식적인 차이가 무슨 문제가 되느냐?'라는 단순한 반론도 가능하지만 그건 '팔만대장경도 모르면 빨래판'이라는 단순한 언급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형식이 뭐가 중요하냐 내용이 중요하지'라는 발언은 두 가지로 나눠진다. 하나는 실제로 형식에 구애받지 않더라도 내용을 잘 이해하고 그 내용을 잘 이행할 수 있는 경우고 다른 하나는 제대로 할 줄도 모르면서 제대로 하는 방법을 따라가는 것이 그냥 귀찮은 거다. 이걸 B급 식으로 언급하자면 이런 거다.
무협소설에서 주로 검을 잘 다루는 주인공 역이거나 혹은 주인공을 가르치는 초절정 고수의 역을 맡은 인물들은 대체로 '검없이도 검을 이기는 단계'에 오르는 것으로 그 내공을 표현하는 것이 보통이다. 즉 이런 단계에 이른 이는 검이라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아도 검을 가지고 할 수 있는 모든 무공을 다 내보일 수 있는 이들이고 이 단계에 이르러야 비로서 '형식이 뭐가 중요하냐? 내용이 중요하지'라는 말을 할 수가 있는 거다. 그 나머지들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냥 하기 싫고 귀찮은 걸 그런 식으로 눙치러드는 것이다.
다시 B급 정서 이야기.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B급정서란 내용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형식적이고 장르적인 차이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형식적 차이는 대체로 해당 사회의 주류 가치관에 의해 그 경중이 다르게 평가받으며 따라서 해당 분야를 대하는 창작자들과 소비자들의 태도 역시 달라지게 마련이고 당연히 같은 주제를 다루더라도 그 주제의식에 창작자나 소비자가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 역시 차이가 나게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사실 B급과 B급 정서는 다른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B급이란 그야말로 A급이 아닌 어떤 형식을 지칭하는 것인 반면 B급 정서란 같은 주제를 다루더라도 B급이란 형식을 차용하는 것을 즐기는 태도내지는 취향을 일컫는 것으로 말이다. 마치 노동자와 노동 계급은 전혀 다른 말인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기준에서 보자면 B급 정서라는 단어를 사용한 해당 기사는 사실 완전히 잘못된 단어를 사용한 셈이다. 해당 기사에서 언급한 대중음악계의 현상은 그저 B급이지 B급 정서라고 부를만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브로라는 가수가 불렀다는 노래의 경우를 보자. 왜곡된 성차별적 의식을 그저 날 것으로 드러내었다고 해서 그것이 B급 정서일까? 아니 그건 그냥 그 자체로 수준낮은 B급일 뿐이다. 만약 그 노래를 둘러싼 B급정서란 게 있다면 그 노래를 듣고 저런 찌질한 생각을 하는 남자가 되면 안 된다는 것 정도일 게다. B급 정서란 게 그냥 인간이 B급인 것을 지칭하는 건 아니란 말이다.
아마도 이런 분위기가 조성된 것도 그 시초는 인터넷일 것이고 인터넷 커뮤니티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B급 문화를 이해하는 B급정서를 가진 이들이 B급 문화를 옹호해준 탓이 클 것이다. 그런데 우습게도 최근엔 그런 행위가 마치 B급 문화가 그 자체로 무언가 대단한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인 걸로 착각하는 모질이들이 너무 늘어났다. 착각하지 마라. 애초에 B급 문화에도 잘 찾아보면 A급 몾지않은 의미들이 숨어있다는 걸 알려주고 설파하고 옹호한 이들은 B급만이 아니라 A급도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잘 이해하는 안목을 가진 이들인 거다. 그러니까 지금 너거들이 열심히 빨래판으로 이용하는 그게 팔만대장경이란 걸 아는 사람들이었던 거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내가 B급 문화를 폄하하려는 건 아니다. B급 문화 역시 나름의 특징과 의미, 문화적 포지션을 갖고 있다. 그러나 B급 문화가 가지는 치명적인 약점은 결국 그 B급 문화가 가지는 특징, 의미, 문화적 포지션 기타등등같은 것들은 B급 인간들은 볼 수 없다는 거다. B급 문화를 이해하는 수준을 넘어선 안목을 갖고 있지만 그래도 B급 문화를 애호하는 B급 정서인 사람과 그저 B급 문화만 이해할 수 있는 B급인 인간은 완전히 다르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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