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먹고 바람똥

"차가운 사과가 더 달콤한 이유는?" - 경향신문 과학 오디세이 인용.

The Skeptic 2014. 9. 2. 02:59

9월 1일자 경향신문 칼럼 중 하나다. 굳이 책이 아니어도 이래저래 하루에도 꽤 많은 양의 글을 접하는 사람이긴 하다. 그런데 솔직히 그 글들중 '잘 썼다'라고 여겨지는 글은 거의 만나기 힘들다. 특히 자칭 문학 취향이라는 아마추어들의 글은 대부분 근거를 무시하거나 근거에 대해서 납득할만큼의 설명을 못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렇다고 내가 그들에게 그런 류의 비판을 가하진 않는다. 왜?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류의 비판에 대한 그네들의 공통된 반응은 '주관성에 대한 존중'이라는 거다. 문제는 내가 그걸 부정한 적이 없다는 거다. 오히려 어떤 사건이나 맥락에 대한 타인의 주관적인 해석에 대해서 더 공격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자칭 문학취향이라는 아마추어들이 더 심한 편이다. 즉 자신들의 해석은 진실이지만 그 해석에 반하거나 혹은 단순히 거슬리기만 해도 그것은 반동이라는 식의 반응을 보인다. 


이게 실은 자칭 문학취향이라는 아마추어들이 누워서 침뱉는 전형적인 모습이고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지 그런 짓을 해놓고도 왜 그들은 스스로 깨닫지 못 하는가 하는 문제 는 이 글의 제일 앞 문장과 연결된다. '근거를 무시하거나 혹은 근거에 대해 납득할만한 설명을 못 한다' 


무시하는 경우는 뭐라 더 말할 필요조차 없다. '왜'라는 질문을 무시하면서 자칭 문학취향이라고 떠드는 건 문학을 무슨 교양거리 정도로 받아 들이는 수준인 것이다. 사실 이런 이들에게 중요한 건 문학작품 그 자체가 아니라 권위있는 사람이 썼다는 문학해설서들이 더 중요하다. 그러니까 고딩용 국어 참고서면 딱인 사람들인 거다. 


반면 '설명을 못 한다'는 건 약간, 정말로 약간 복잡하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로부터 시작된 철학의 역사는 근자에 이르러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대체 뭐란 말인가?'라는 수준까지 발전했다. 그러니까 다소 모호했던 첮번째 질문이 많이 구체화되었고 사실 이제는 후자의 질문만 제대로 알아도 '철학? 그 까이거 뭐 대충'해도 되는 수준에 이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 정작 인간에 대한 높은 이성적, 감성적 이해도를 필요로 하는 부문인 문학이 자신의 취향이라고 떠드는 인간들중 대부분은 그런 능력이 바닥이라는 거다. 때문에 아주 당연하게도 그들은 자신과 다른 '타인의 해석'에 대해서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문제는 여기서 끝난다면 좋겠지만 실상 그런 현상이 증명해주는 것은 타인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진다는 것만이 아니라 전반적인 이해도가 떨어진다는 의미다. 


왜? '내가 알고 있는 것에 대체 뭐란 말인가?'란 질문을 한 번이라도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해본 사람이라면 그런 과정을 거쳐 자신과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들, 자신이 믿고 있는 신념, 가치관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떤 식으로 내재화되었는가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알 수 있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나만이 아니라 인간이란 존재 자체에 대해서도 이전과는 사뭇 다른 시각을 갖게 되는 것이 보통이며 일반적으로 이 과정은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는 이로움이 있다. 


그런데 자칭 문학 취향이라고 떠드는 인간들중 사실 대부분은 그런 거 아예 모른다. 웃기는 건 그런 이들이 그런 진지한 고민을 통해 전문적인 글쟁이의 반열에 올라간 이들을 지나치게 가소롭게 본다는 점이다. 전문적인 글쟁이 수준이 되니까 너거들처럼 인식수준이 좁고 얕은 인간들이 읽기에도 쉬운 글을 쓸 수 있는 건데 정작 그들은 그걸 이해하지 못 한다. 그냥 그들은 자신들이 읽기에 시운 글은 무조건 수준이 떨어지는 거다. 


게다가 쉬운 글이라면 무조건 수준이 떨어진다고 보는 자칭 문학취향들이 그런 쉬운 글을 읽을리 없고 그러니 그게 얼마나 대단한 능력인지는 더더욱 알 수 없다. 그냥 어려운 한자어나 바리바리 써주면 명문이라고 호들갑떨고 그걸 흉내내려는 이들을 보고 있으면 마치 조선시절 한글은 언문이라 부르며 천시했던 인간들이 떠오를 뿐이다. 


아무튼 원래 하려든 말은 이런 게 아니었다. 오랜만에 정말 잘 쓴 글 하나를 봐서 자료로 남길 겸 써보는 거다. 앞서 언급한 '대체 내가 아는게 뭐란 말인가?'라는 질문에 딱 부합한다고 보긴 어렵지만 적어도 그것이 어떤 과정을 수반하는 가에 대해선 꽤나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만한 글이라고 본다. 


우상숭배자들이나 문학, 철학, 인문학이 교양이라고 보는 이들, '그래서 답이 뭔데?'라는 질문을 할 이들은 보지 마라. 하등의 도움도 안 된다. 본인들에게나 타인들에게나. 




[과학 오디세이]차가운 사과가 더 달콤한 이유는?

이상욱 | 한양대 교수·과학철학



시장에 햇사과가 한창이다. 사과를 좋아하는 필자로서는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일반적으로 같은 사과라도 차가울 때가 따뜻할 때보다 더 달콤하게 느껴진다. 밤새 냉장한 사과를 아침에 먹을 때 특별히 맛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질 현상을 모두 설명하는 것이 과학의 목표라면 이 현상에 대한 설명도 있어야 할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훌륭한 설명이 있다. 과일의 단맛은 주로 과일이 함유한 과당이란 물질에서 나오는데, 6개의 탄소 원자가 사슬처럼 연결된 모양을 가진 이 과당은 온도에 따라 복잡한 모양으로 엉키거나 일직선에 가까운 모양으로 풀리기도 하면서 다양한 형태를 취한다. 그런데 낮은 온도에서는 더 강한 단맛을 내는 베타 형태가 알파 형태보다 더 안정적이어서 보다 많은 과당 분자가 베타 형태를 취하게 된다. 그래서 베타 형태의 과당이 더 많은 ‘차가운’ 사과가 그렇지 않은 ‘따뜻한’ 사과보다 더 달콤한 것이다.


완벽한 설명이 아닌가? 꼭 그렇지는 않다. 일단 이 설명은 차가운 사과의 달콤함을 화학적으로 해명한 것은 사실이지만 ‘왜’ 우리가 차가운 사과를 더 달콤하게 느끼는지 자체를 설명하지는 못했다. 처음 질문은 ‘차가움’과 ‘따뜻함’ 같은 일상적 차이가 왜 사과의 단맛에 차이를 가져오는지였다. 이에 대해 화학적 설명은 사과 성분의 구조적 차이가 사과의 단맛에 차이를 가져온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왜 베타 형태의 과당이 알파 형태의 과당보다 우리에게 ‘더 달게 느껴지는지’는 여전히 설명되지 않았다.


이 지점에서 신경과학이 등장할 수밖에 없다. 과당의 여러 이성질체를 차등적으로 달게 느끼는 것은 결국 우리 뇌가 아닌가? 단맛을 포함한 다섯 가지 미각 수용체로부터 오는 전기화학적 신호의 패턴이 어떻게 미각 신경을 통해 통합적으로 해석되어 우리의 ‘미각 경험’을 구성하는지에 대한 설명도 대략적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아마도 필자가 과문한 탓이겠지만, 과당 분자의 구조적 차이가 우리의 단맛 감각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에 대한 신경과학적 설명은 찾기 어렵다.


설사 이런 설명이 완벽하게 주어져도 여전히 남는 의문이 있다. 우리 인류가 무슨 이유로 이렇게 단맛을 느끼는 특별한 메커니즘을 갖게 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이다. 이에 대한 설명은 진화생물학이 담당한다. 우선 단맛을 내는 물질이 주로 탄수화물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탄수화물은 우리 몸의 주요 에너지원이므로 탄수화물이 포함된 먹을 것을 쉽게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은 분명 인류 조상의 생존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여기에 더해 우리가 단맛에서 ‘즐거움’을 느낀다면, 우리는 몸에 필요한 탄수화물을 열심히 찾게 되는 진화적 이득을 얻었을 것이다.


결국 차가운 사과가 왜 더 단지에 대한 ‘완전한’ 과학적 설명은 과당 분자의 3차원적 구조와 그 과당 분자를 ‘달게’ 느끼는 우리 몸의 신경 메커니즘, 그리고 그러한 메커니즘을 갖게 된 진화생물학적 설명이 함께 결합된 형태가 될 것이다. 이들 설명 각각에 아직 보충할 점은 많지만 이런 방향으로 설명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이제 ‘완전한’ 과학적 설명은 차가운 사과의 달콤함을 남김없이 설명한 셈인가?


그런데 말이다. 꼭 그렇지는 않다. ‘완전한’ 과학적 설명이 주어져도 우리가 사과를 깨물 때 느끼는 ‘주관적 경험’으로서의 달콤함은 여전히 해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단순히 탄수화물이 들어 있는 물질을 판별하기 위해 ‘단맛’이 동원되었다면 왜 우리는 단맛 대신 ‘쓴맛’을 동원하도록 진화하지 않았을까? ‘쓴맛’은 많은 경우 ‘즐거움’을 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면, 이는 여러 미각 중에 좋은 느낌의 미각을 그저 ‘단맛’으로 부른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이처럼 차가운 사과의 달콤함은 과학자와 철학자 모두에게 여전히 더 탐구할 주제를 풍성하게 남겨두고 있다. 보다 만족스러운 설명을 얻기 위해 각각의 연구는 필연적으로 통합되어야 할 것이다. 세상은 과학과 철학으로 나누어져 있지 않다. 오직 우리의 연구 방식이 그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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