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할 것과 기억할 것이 많은 인생은 행복하다."
추억이란 그것이 행복했던 기억이든 후회가 묻어나는 것이든 많을 수록 좋다. 그것은 그가 지내온 인생이 무미건조하지 않았음을, 인간으로서 느껴야 할 모든 사건과 감정을 두루두루 경험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경우에도 그 질에 대한 부분은 별개로 취급되어야 마땅하다. 일일이 기억하기도 힘들 만큼 많은 기억들을 갖고 있다하더라도 그 기억들로 부터 추출된 반성과 각성이 없다면 그것은 단순한 양으로 머물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양이 많아질 수록 반성과 각성의 계기가 늘어난다는 점에서 질이 하락할 가능성은 점진적으로 줄어들지만.
이 영화 '이터널 선샤인'은 바로 그것에 대한 이야기이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코미디 배우로 유명한 짐 캐리의 전혀 다른 면목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영화를 소개하면서 '이 영화는 이런 점때문에 볼 만하다'고 말하는 것은 과거 정영일(개인적으로 별로라고 생각하지만) 같은 평론가들이 사실상 평론활동이라기 보다는 영화사업의 홍보꾼 역할을 하던 시절에 횡행하던 방식이다. 해서 그런 방식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성립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리고 이 영화에 그 방식이 적용가능하다. 짐 캐리가 완전히 다르게 보일 것이다.
그리고 사실 코미디 연기라는 게 생각보다 녹록한 것이 아니기도 하다. 물론 최근에 성행하는 할리우드의 수준낮은 슬랩스틱 코미디 영화들은 논외로 한다. 그 영화들을 보고 있노라면 새삼 배삼룡과 심형래가 무척 그리워진다. 그들의 슬랩스틱 코미디는 내 기억속에서 여전히 세계 최고수준이다. 물론 그것은 웃음이란 것이 가지는 강한 지역색때문이기도 하다. 슬픔을 비롯한 다른 감정들을 자아내는 요소는 만국공통인 것이 많지만 웃음만큼은 지역적이 면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영화는 그 이야기다.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 어떤 계기로 - 사실 일반적인 경우 결정적인 계기가 될만한 사건이란 것은 없다. 그저 콩깍지가 사라지고 현실로 돌아오면서 보게 되는 사소한, 그러나 자신에게 매우 중요한 몇 가지들이 부딪치고 누적된 결과들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그것은 둘중 하나든 둘다이든 자의식이 매우 강한 경우다. 이들은 모든 것이 마음에 들어도 결정적인 단 한가지가 안 맞으면 헤어질 수 있다 - 서로 반목하게 되고 여자가 먼저 그에 대한 기억을 지우고, 그 사실을 안 남자 역시 홧김에 그 녀에 대한 기억을 지우는 것을 의뢰하게 되고 영화는 바야흐로 주된 사건인 기억을 지우는 과정과 그에 저항하는 남자의 이야기로 진행된다.
왜 저항하게 되는가? 그것이 바로 기억의 힘이다. 비록 지금은 그/그녀가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울지 모르지만 추억속의 그/그녀는 여전히 내가 사랑하는 그리고 사랑할만한 바로 그/그녀이기 때문이다. 누군들 그런 행복한 기억을 지우고 싶어할 것인가? 어차피 인간이란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서로서로 참아내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고 서로에게 상처주지 않는 방법을 배워나가는 존재가 아니던가? 결국 기억속의 그/그녀는 나의 성장에 도움을 주는 너무나도 고마운 존재일 뿐이다. 그렇다고 모든 인간들이 다 이런 긍정적인 순환과정을 거친다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거의 대부분이 그런 과정을 생략하지만 말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양과 질은 언제나 별개다.
그렇다면 여기서 또 한가지 질문 하나. 과거의 기억을 삭제한다면 과연 그/그녀는 그/그녀를 기억하지 못할까? 아니 처음보는 사람처럼 된다고 한들 호감을 갖지 못하게 될 것인가? 영화는 애시당초 그것이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한다. 당연한 이야기다. 어차피 기억의 일부를 지운다고 한들 그 인간까지 바뀌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인생동안 형성되어온 호감/비호감의 영역안에서 그/그녀는 항상 긍정형으로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억을 변형시킨다면 어떨까? 그 범위와 강도에 따라서 매우 달라지겠지만 가능하리라고 본다. 기억이란 결국 그가 살아온 지난 날이고 그 시간들의 축적이 곧 그 인간의 가치관이기 때문이다.
루이 알튀세르가 언급했던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들이 결과적으로 그런 일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들은 사실을 가리킨다기 보다는 특정한 이데올로기에 적합한 사실들을 만들어 내고 사람들로 하여금 진실인 양 믿게 만드는데 그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장치들은 절대적으로 국가권력에 종속된 것은 아니다. 우리처럼 형식적으로라도 민주주의가 정착된 나라에선 그것은 '정치적 야합'의 형태를 지닌다. 언론과 특정 계급을 지지하는 정당의 밀월관계가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고로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가 기능하는 기본적인 구조는 계급의 층위에서다. 이것이 무서운 이유는 이들이 존재하고 기능함으로 해서 특정 계급이 국가권력을 얻고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인식을 재생산해내기 때문이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교과서 개정 문제나, 방송을 재벌 신문사나 재벌들에게 던져주겠다는 문제들이 정말로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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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어쨌거나 이것은 영화에 대한 글이다. 쩝...
추억이란 그것이 행복했던 기억이든 후회가 묻어나는 것이든 많을 수록 좋다. 그것은 그가 지내온 인생이 무미건조하지 않았음을, 인간으로서 느껴야 할 모든 사건과 감정을 두루두루 경험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경우에도 그 질에 대한 부분은 별개로 취급되어야 마땅하다. 일일이 기억하기도 힘들 만큼 많은 기억들을 갖고 있다하더라도 그 기억들로 부터 추출된 반성과 각성이 없다면 그것은 단순한 양으로 머물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양이 많아질 수록 반성과 각성의 계기가 늘어난다는 점에서 질이 하락할 가능성은 점진적으로 줄어들지만.
이 영화 '이터널 선샤인'은 바로 그것에 대한 이야기이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코미디 배우로 유명한 짐 캐리의 전혀 다른 면목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영화를 소개하면서 '이 영화는 이런 점때문에 볼 만하다'고 말하는 것은 과거 정영일(개인적으로 별로라고 생각하지만) 같은 평론가들이 사실상 평론활동이라기 보다는 영화사업의 홍보꾼 역할을 하던 시절에 횡행하던 방식이다. 해서 그런 방식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성립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리고 이 영화에 그 방식이 적용가능하다. 짐 캐리가 완전히 다르게 보일 것이다.
그리고 사실 코미디 연기라는 게 생각보다 녹록한 것이 아니기도 하다. 물론 최근에 성행하는 할리우드의 수준낮은 슬랩스틱 코미디 영화들은 논외로 한다. 그 영화들을 보고 있노라면 새삼 배삼룡과 심형래가 무척 그리워진다. 그들의 슬랩스틱 코미디는 내 기억속에서 여전히 세계 최고수준이다. 물론 그것은 웃음이란 것이 가지는 강한 지역색때문이기도 하다. 슬픔을 비롯한 다른 감정들을 자아내는 요소는 만국공통인 것이 많지만 웃음만큼은 지역적이 면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영화는 그 이야기다.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 어떤 계기로 - 사실 일반적인 경우 결정적인 계기가 될만한 사건이란 것은 없다. 그저 콩깍지가 사라지고 현실로 돌아오면서 보게 되는 사소한, 그러나 자신에게 매우 중요한 몇 가지들이 부딪치고 누적된 결과들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그것은 둘중 하나든 둘다이든 자의식이 매우 강한 경우다. 이들은 모든 것이 마음에 들어도 결정적인 단 한가지가 안 맞으면 헤어질 수 있다 - 서로 반목하게 되고 여자가 먼저 그에 대한 기억을 지우고, 그 사실을 안 남자 역시 홧김에 그 녀에 대한 기억을 지우는 것을 의뢰하게 되고 영화는 바야흐로 주된 사건인 기억을 지우는 과정과 그에 저항하는 남자의 이야기로 진행된다.
왜 저항하게 되는가? 그것이 바로 기억의 힘이다. 비록 지금은 그/그녀가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울지 모르지만 추억속의 그/그녀는 여전히 내가 사랑하는 그리고 사랑할만한 바로 그/그녀이기 때문이다. 누군들 그런 행복한 기억을 지우고 싶어할 것인가? 어차피 인간이란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서로서로 참아내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고 서로에게 상처주지 않는 방법을 배워나가는 존재가 아니던가? 결국 기억속의 그/그녀는 나의 성장에 도움을 주는 너무나도 고마운 존재일 뿐이다. 그렇다고 모든 인간들이 다 이런 긍정적인 순환과정을 거친다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거의 대부분이 그런 과정을 생략하지만 말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양과 질은 언제나 별개다.
그렇다면 여기서 또 한가지 질문 하나. 과거의 기억을 삭제한다면 과연 그/그녀는 그/그녀를 기억하지 못할까? 아니 처음보는 사람처럼 된다고 한들 호감을 갖지 못하게 될 것인가? 영화는 애시당초 그것이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한다. 당연한 이야기다. 어차피 기억의 일부를 지운다고 한들 그 인간까지 바뀌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인생동안 형성되어온 호감/비호감의 영역안에서 그/그녀는 항상 긍정형으로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억을 변형시킨다면 어떨까? 그 범위와 강도에 따라서 매우 달라지겠지만 가능하리라고 본다. 기억이란 결국 그가 살아온 지난 날이고 그 시간들의 축적이 곧 그 인간의 가치관이기 때문이다.
루이 알튀세르가 언급했던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들이 결과적으로 그런 일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들은 사실을 가리킨다기 보다는 특정한 이데올로기에 적합한 사실들을 만들어 내고 사람들로 하여금 진실인 양 믿게 만드는데 그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장치들은 절대적으로 국가권력에 종속된 것은 아니다. 우리처럼 형식적으로라도 민주주의가 정착된 나라에선 그것은 '정치적 야합'의 형태를 지닌다. 언론과 특정 계급을 지지하는 정당의 밀월관계가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고로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가 기능하는 기본적인 구조는 계급의 층위에서다. 이것이 무서운 이유는 이들이 존재하고 기능함으로 해서 특정 계급이 국가권력을 얻고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인식을 재생산해내기 때문이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교과서 개정 문제나, 방송을 재벌 신문사나 재벌들에게 던져주겠다는 문제들이 정말로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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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어쨌거나 이것은 영화에 대한 글이다.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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