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홍보사의 불학무식함은 자주 지적하지만 또 매번 당할 수밖에 없다는 비극적인 속성을 갖고 있다. 이 영화 '비카인드 리와인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어째서 영화 홍보사 불한당들은 이야기로서 극으로서의 영화에 대해 천편일률적인 장르정 특성만을 죽어라고 강조해대는 것일까? 대중들이 불학무식하니 그런 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가장 알아듣기 좋다라고 생각하나 보다.
그 옛날 한나라회 무식한 정치인 색희가 토론 프로그램 나와서 자세한 내용보다는 단순하고 강하게 이야기해야지 대중들이 알아먹는다고 주장했던 것처럼 말이다. 내가 보기에 그 당시 그 정치인 색희는 그냥 자신의 무식함을 그런 식으로 변명했던 것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당시와 달리 난 그 의견에 대해서 적극 반박할 근거나 의지, 논리를 갖고 있지 않다. 솔직히 지금은 나조차도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다. 그렇다고 그 대중이란 사람들에게 핑계거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살기가 팍팍하니까. 아주 편리한 변명이다. 그 어떤 곳, 어떤 상황에서도 모두 통용되니까. 그것이 사실이든 핑계이든 상관없이 그런 인식에 기반한 행동에 대한 책임은 늘상 뒤따라 온다.
아무튼 이 영화는 일단 코미디다. 그러나 마냥 코미디만은 아니다. 내용은 이렇다. 과잉행동증후군을 앓고 있는 것이 분명한 잭블랙(연기를 잘한다는데 난 아직까지도 왜 그렇게 평가받는지 이해하기 어렵다)이 피해망상이 도져서 발전소를 폭파시키러 갔다가 감전사고를 당하고 신체가 일종의 방전형 전지가 되어(과학적 근거따위 다 필요없다) 돌아와서 모스뎁(연기 잘 한다. 그의 영어를 거의 한 마디도 알아들을수 없다는 치명적인 약점에도 불구하고 난 그의 영어발음이 좋다)이 주인장대신 임시로 일하고 있는 비디오 가게의 모든 테잎을 지워버리고 만다. 주인이 돌아오기 전까지 모든 상황을 정상적으로 돌려놔야 하는 그들로선 별 수없이 손님들이 찾는 비디오를 스스로 다시 찍기에 이른다.
이 영화엔 몇 가지 중요한 사건들과 그 단계들이 존재한다. 가장 먼저 그 비디오 가게가 있는 건물에서 꽤 유명한 재즈 뮤지션이 출생했고 이 건물과 도시엔 그의 영혼이 녹아있다고 믿는 비디오 가게 주인과 그 이야기를 믿는 모스뎁의 존재. 사람들은 이 전설같은 이야기에 대해서 사실 별로 주목하지 않고 지나가는데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그것이 극적으로 증명되는 사건이 벌어지는데 그것은 바로 '지적재산권' 문제에 걸려서 잭블랙과 모스뎁이 만든 가내수공업형 리메이크 영화들이 폐기당하는 장면부터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허공에 떠돌아 다니는 모든 이야기들을 집약하고 이름표를 다는 순간 '오리지날'이란 찬사와 함께 범접할 수 없다는 딱지를 붙이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물론 알다시피 그것은 세상 모든 것을 자본의 영향력 아래 놓음으로서 경쟁과 수익을 극대화해내야만 연명할 수 있는 자본과 권력의 부적절한 관계에서 나온'사생아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그 속에서 대니 글로버와 모스뎁이 믿고 있는(설령 진실이 아닐지라도) 재즈 뮤지션의 이야기를 누구나 소유할 수 있고 누구나 이야기할 수 있으며 그 누구도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는 이야기라는 점이다.
두번째 중요한 사건은 비디오가 지워지고 가내수공업으로 영화를 새로 찍게 되는 과정의 일이다. 처음 몇 번은 잭블랙가 모스뎁 두명으로 가능하지만 점점 주문량이 늘어나면서부터 그것이 불가능해지자 그들은 엄청난 아이디어를 내놓는데 그것이 바로 주문한 사람들과 지역주민들을 영화속에 출연시키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아이디어는 대형 히트를 친다. 사람들은 자신이 출연한 영화를 보며 즐거워 한다.
처음 단계에선 이미 만들어져 있던 영화들을 두명의 동네 건달과 한 명의 세탁소 여직원이 리메이크하는 것으로 출발한다. 그러다 다음 단계로 들어서는데 그것은 바로 그 리메이크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나는 단계다. 생산과정에 일체 참여하지 않고 그저 소비하기만 하던 사람들이 직접 생산에 참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격렬하게 몸을 움직이는 스포츠조차도 프로라는 이름아래 단순소비와 자본집중의 상품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참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지 않은가.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사생아 자본주의'는 자신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이런 일탈적인 움직임을 용서치 않는다. 그것이 바로 '지적 재산권'이란 주장이다. 여기서 이 영화의 세번째 단계이자 대단원으로 넘어간다. 글 첫 머리에 언급한 누구의 소유도 아닌 전설같은 이야기를 주인공들과 마을 주민들이 모여서 여전히 열악하지만 '궁하면 통한다'는 가내수공업 노가다 정신으로 영화로 제작해내는 것이다.
예전에 막스가 이렇게 말했었다. 자본주의의 시작은 생산조건과 인간을 분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고. 자본주의 속의 인간은 만들어진 상품을 소비하며 살아가지만 그것이 어떻게 무슨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지에 대해선 점점 더 무심해진다. 그저 그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노동을 판 댓가라는 아주 모호한 명목을 앞세운 임금과 그 임금으로 소비할 수 있는 과정이 생략된 상품뿐이다.
어째서 이 상품의 가격은 이렇게 책정되는지? 이 상품을 만든 사람은 누구인지? 그 사람은 이 상품을 만들고 얼마를 받았는지? 그가 받은 임금은 그가 살아가기에 충분한 것인지? 그 모든 것들은 완벽하게 생략된다. 이 질문에 '그'가 아니라 '나'를 대입해도 마찬가지다. 그저 질문이 뒤집어질 뿐 의미는 다를 것이 없고 여전히 관심이 없는 것도 마찬가지다. 결국 이 과정은 단순히 상품생산-유통-소비 과정의 생략만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의 '사회적 존재'로서의 가치까지도 생략해가는 과정인 것이다.
이 영화 '비카인드 리와인드'는 소박하고 노가다스럽게 그 과정에 대한 복원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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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단순 코미디가 아니란 말이다. 이 불한당같은 영화 홍보사 색희들아!!!
덧니)
아마도 이런 메시지를 담고 있는 영화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생각보다 '꽤' 진보적이라고 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공동체와 그 공동체에 대한 무한 책임을 강조하는 것은 진보라기 보다는 '보수주의'의 가치다. 요즘 한참 이슈가 되고 있는 재개발의 문제중 하나가 마을 공동체의 파괴라는 점을 지적해야 하는 사람들은 진보주의자들이 아니라 보수주의자들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자칭 보수주의자들은 그것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다. 아니 아예 괌심조차 없다. 그러니 별 수없이 진보주의자들이 그것까지 떠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대가리에 똥만 찬 이 땅의 공원노친네들은 그 '사생아 자본주의자'들을 보수주의자라고 지지한다. 모르면 그냥 조용히 좀 있어주면 안 될까? 괜히 니네 자식들하고 손주손녀들에게 민폐끼치지 말고 말이다. 그런 죄를 저질러놓고 나중에 뒈지고 나면 제삿상이라도 받을 수 있겠니? 하긴 그런 것을 알수있을 정도면 그런 짓거리는 하지 않을테지. 뭘 기대하겠냐. 그냥 시간이 약이다.
그 옛날 한나라회 무식한 정치인 색희가 토론 프로그램 나와서 자세한 내용보다는 단순하고 강하게 이야기해야지 대중들이 알아먹는다고 주장했던 것처럼 말이다. 내가 보기에 그 당시 그 정치인 색희는 그냥 자신의 무식함을 그런 식으로 변명했던 것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당시와 달리 난 그 의견에 대해서 적극 반박할 근거나 의지, 논리를 갖고 있지 않다. 솔직히 지금은 나조차도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다. 그렇다고 그 대중이란 사람들에게 핑계거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살기가 팍팍하니까. 아주 편리한 변명이다. 그 어떤 곳, 어떤 상황에서도 모두 통용되니까. 그것이 사실이든 핑계이든 상관없이 그런 인식에 기반한 행동에 대한 책임은 늘상 뒤따라 온다.
아무튼 이 영화는 일단 코미디다. 그러나 마냥 코미디만은 아니다. 내용은 이렇다. 과잉행동증후군을 앓고 있는 것이 분명한 잭블랙(연기를 잘한다는데 난 아직까지도 왜 그렇게 평가받는지 이해하기 어렵다)이 피해망상이 도져서 발전소를 폭파시키러 갔다가 감전사고를 당하고 신체가 일종의 방전형 전지가 되어(과학적 근거따위 다 필요없다) 돌아와서 모스뎁(연기 잘 한다. 그의 영어를 거의 한 마디도 알아들을수 없다는 치명적인 약점에도 불구하고 난 그의 영어발음이 좋다)이 주인장대신 임시로 일하고 있는 비디오 가게의 모든 테잎을 지워버리고 만다. 주인이 돌아오기 전까지 모든 상황을 정상적으로 돌려놔야 하는 그들로선 별 수없이 손님들이 찾는 비디오를 스스로 다시 찍기에 이른다.
이 영화엔 몇 가지 중요한 사건들과 그 단계들이 존재한다. 가장 먼저 그 비디오 가게가 있는 건물에서 꽤 유명한 재즈 뮤지션이 출생했고 이 건물과 도시엔 그의 영혼이 녹아있다고 믿는 비디오 가게 주인과 그 이야기를 믿는 모스뎁의 존재. 사람들은 이 전설같은 이야기에 대해서 사실 별로 주목하지 않고 지나가는데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그것이 극적으로 증명되는 사건이 벌어지는데 그것은 바로 '지적재산권' 문제에 걸려서 잭블랙과 모스뎁이 만든 가내수공업형 리메이크 영화들이 폐기당하는 장면부터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허공에 떠돌아 다니는 모든 이야기들을 집약하고 이름표를 다는 순간 '오리지날'이란 찬사와 함께 범접할 수 없다는 딱지를 붙이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물론 알다시피 그것은 세상 모든 것을 자본의 영향력 아래 놓음으로서 경쟁과 수익을 극대화해내야만 연명할 수 있는 자본과 권력의 부적절한 관계에서 나온'사생아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그 속에서 대니 글로버와 모스뎁이 믿고 있는(설령 진실이 아닐지라도) 재즈 뮤지션의 이야기를 누구나 소유할 수 있고 누구나 이야기할 수 있으며 그 누구도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는 이야기라는 점이다.
두번째 중요한 사건은 비디오가 지워지고 가내수공업으로 영화를 새로 찍게 되는 과정의 일이다. 처음 몇 번은 잭블랙가 모스뎁 두명으로 가능하지만 점점 주문량이 늘어나면서부터 그것이 불가능해지자 그들은 엄청난 아이디어를 내놓는데 그것이 바로 주문한 사람들과 지역주민들을 영화속에 출연시키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아이디어는 대형 히트를 친다. 사람들은 자신이 출연한 영화를 보며 즐거워 한다.
처음 단계에선 이미 만들어져 있던 영화들을 두명의 동네 건달과 한 명의 세탁소 여직원이 리메이크하는 것으로 출발한다. 그러다 다음 단계로 들어서는데 그것은 바로 그 리메이크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나는 단계다. 생산과정에 일체 참여하지 않고 그저 소비하기만 하던 사람들이 직접 생산에 참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격렬하게 몸을 움직이는 스포츠조차도 프로라는 이름아래 단순소비와 자본집중의 상품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참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지 않은가.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사생아 자본주의'는 자신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이런 일탈적인 움직임을 용서치 않는다. 그것이 바로 '지적 재산권'이란 주장이다. 여기서 이 영화의 세번째 단계이자 대단원으로 넘어간다. 글 첫 머리에 언급한 누구의 소유도 아닌 전설같은 이야기를 주인공들과 마을 주민들이 모여서 여전히 열악하지만 '궁하면 통한다'는 가내수공업 노가다 정신으로 영화로 제작해내는 것이다.
예전에 막스가 이렇게 말했었다. 자본주의의 시작은 생산조건과 인간을 분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고. 자본주의 속의 인간은 만들어진 상품을 소비하며 살아가지만 그것이 어떻게 무슨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지에 대해선 점점 더 무심해진다. 그저 그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노동을 판 댓가라는 아주 모호한 명목을 앞세운 임금과 그 임금으로 소비할 수 있는 과정이 생략된 상품뿐이다.
어째서 이 상품의 가격은 이렇게 책정되는지? 이 상품을 만든 사람은 누구인지? 그 사람은 이 상품을 만들고 얼마를 받았는지? 그가 받은 임금은 그가 살아가기에 충분한 것인지? 그 모든 것들은 완벽하게 생략된다. 이 질문에 '그'가 아니라 '나'를 대입해도 마찬가지다. 그저 질문이 뒤집어질 뿐 의미는 다를 것이 없고 여전히 관심이 없는 것도 마찬가지다. 결국 이 과정은 단순히 상품생산-유통-소비 과정의 생략만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의 '사회적 존재'로서의 가치까지도 생략해가는 과정인 것이다.
이 영화 '비카인드 리와인드'는 소박하고 노가다스럽게 그 과정에 대한 복원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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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단순 코미디가 아니란 말이다. 이 불한당같은 영화 홍보사 색희들아!!!
덧니)
아마도 이런 메시지를 담고 있는 영화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생각보다 '꽤' 진보적이라고 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공동체와 그 공동체에 대한 무한 책임을 강조하는 것은 진보라기 보다는 '보수주의'의 가치다. 요즘 한참 이슈가 되고 있는 재개발의 문제중 하나가 마을 공동체의 파괴라는 점을 지적해야 하는 사람들은 진보주의자들이 아니라 보수주의자들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자칭 보수주의자들은 그것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다. 아니 아예 괌심조차 없다. 그러니 별 수없이 진보주의자들이 그것까지 떠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대가리에 똥만 찬 이 땅의 공원노친네들은 그 '사생아 자본주의자'들을 보수주의자라고 지지한다. 모르면 그냥 조용히 좀 있어주면 안 될까? 괜히 니네 자식들하고 손주손녀들에게 민폐끼치지 말고 말이다. 그런 죄를 저질러놓고 나중에 뒈지고 나면 제삿상이라도 받을 수 있겠니? 하긴 그런 것을 알수있을 정도면 그런 짓거리는 하지 않을테지. 뭘 기대하겠냐. 그냥 시간이 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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