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츄어리즘

[WBC뎐] 임창용의 직구

The Skeptic 2009. 3. 25. 01:21

초딩중딩 시절 동네에서 가장 잘 보는 포수 (사실 나 혼자였지만, 그 덕에 때론 우리 팀만 아니라 상대팀 수비시에도 포수를 봐야만 했던) 로 명성이 자자했던 프로야구 키드였던 나로선 WBC가 즐거울 수 밖에 없다. 게다가 국가대항전이니 응원할 팀도 딱 정해져 있어서 편리하기까지 했다. 그 대회 결승전이 끝나고 나니 이래저래 재미있는 장면들, 감상들도 참 많다. 한동안 생각날 때마다 그 이야기를 해보련다.

 

연장 10회초 2사 2, 3루에서 임창용이 한복판 체인지업성 공을 던졌다가 결승타를 맞고 말았다. 후에 김인식 감독은 '걸러도 좋으니 어렵게 승부할 것'을 주문했으나 임창용은 '사인을 보지 못 했고' 그럼에도 '볼을 던지려 했는데 실투였다'는 기사가 실렸다. 기사가 나오기 전에 나 역시도 그 장면을 몇 번 다시 봤다.

 

분명 임창용의 공 구위는 좋았다. 해외에 진출한 우리 나라 투수들이 최근 갑작스레 회춘 모드라는 것이 놀랍긴 하지만 그 명성만큼 위력적이었다. 다만 제구력에 문제가 좀 있었다. 이치로 이전에도 몇 개의 안타를 맞는 장면을 보면 포수의 리드와는 다른 곳으로 공이 들어왔다. 안타가 되었던 삼진이 되었든 포수의 리드대로 공이 들어가고 있진 않았던 것이다. 그 상황에서 등장한 이치로.

 

초반 승부에서 실투성 공이 이치로의 몸쪽을 파고 들었다. 이치로가 엉덩이를 쪽 빼며 황급히 몸을 피했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피해야 할만큼 몸 쪽을 파고든 공은 아니었다. 이치로는 바깥 쪽으로 흘러 나가는 변화구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임창용의 직구 역시도 그와 비슷한 궤적을 그리는 성향이 많으니 이치로로선 당연히 그 공을 노릴만 했다.

 

만약 고의든 실수든 그 상황에서 어쨌든 승부할 마음이 있었다면 차라리 몸쪽 빠른 공 -> 몸쪽 체인지업 혹은 몸쪽 빠른 직구 -> 다시 몸쪽 빠른 직구 순으로 선택하는 편이 나았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 이전 몇 번의 파울 플라이에서 보듯이 이치로는 철저히 바깥쪽으로 빠지는 변화구에 타이밍을 맞추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상한 방향으로 직구가 날아와도 맞추질 못 하고 파울을 만들어낼 뿐이었다. 파울 타구의 방향 역시 구위에 밀려 나가는 전형적인 커트형 파울이었다. 임창용의 직구구위를 이겨내지 못했던 탓이다.

 

이 쯤에서 이런 생각을 해본다. 어쩌면 임창용은 감독의 사인을 못 본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부를 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승부가 단 칼에 끝나질 않고 질질 끌다보니 찜찜해져서 뒤늦게 감독의 사인대로 공을 던졌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실투란 꼭 그런 상황에서 등장하는 법이다.

 

왕년의 동네 초딩 리그 명 포수였던 나로선 몇 번을 돌려봐도 참 아쉬운 장면이었다. 나라면 그냥 몸쪽 빠른 직구, 그것도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타자쪽으로 붙는 볼루다가 두 개정도 연속으로 찔러 넣으라는 사인을 보냈을 터인데 말이다. 물론 내가 명포수였던 당시엔 그런 사인 함부로 못 냈었다. 그랬다간 동네 꼬마들 몇명 잡았을 것이고 야구 경기를 못 하게 될 우려도 많았다. 행여 코피흘리는 부상자라도 발생할작시면 한동안 아구 금지령이 내려오는 것은 당연지사였으니까.

 

 

덧글)

글을 마치고 난후 지금까지 이래저래 말들이 많다. 게다가 이상하게도 임창용의 10회말 승부에 대한 비난도 많이 눈에 띈다. 이런 저간의 사정을 훓어보고 난 후 내 글을 다시 읽으니 마치 임창용을 비난하거나 비아냥대기 위한 글로 오인받을 소지가 있어 보인다. 단언컨데 절대로 그런 의도로 글을 쓴 것이 아니다. 개인적으로 이번 WBC에서 결승간 것만으로도 난 대만족인 사람이다. 이기거나 지거나는 관심밖이었다. 아! 물론 우승 상금이 100만불이란 것을 알고 난 이후엔 이왕이면 이겼으면 하고 바래기는 했다.

 

내가 이번 WBC 결승전에서 바랬던 것은 승리도 아니고 대한민국에선 그것보다 더 앞서는 가치인 '한일전 승리'도 아니었다. 그저 모든 선수들이 타석에선 마음껏 풀스윙하고, 투수들 역시 마음내키는 대로 열심히 던지는 것만을 바랬다. 그 결과가 삼진일 수도, 홈런을 맞을 수도 있지만 다들 그걸 보면서 씨익 한번 미소지어주는 것이었다. 그것도 가능하면 TV 카메라를 보면서 말이다. 그 자리에서 야구를 하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들에겐 즐길만한 자격이 충분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