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적으로 그러는 건 아닌데 습성이 되어버린 것중의 하나가 있다.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 내가 흔적을 남긴 곳은 자주 들르게 된다. 범죄를 저지른 범인이 꼭 한번정도는 현장을 다시 찾게 된다는 것과 비슷한 심리인 것 같다. 그래서 타루님 토씨엘 또 갔었더랬는데 이런 문장을 보게 됐다.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엄청난 영화광은 아니지만 아마도 이 영화가 상영되었던 시절엔 그 비스무리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저 문장만 보고도 대번에 그 영화를 떠올렸다. 설경구와 전도연이 주연인 좀 드라이한 멜로물인데 꽤 잘 만들었고 재미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바로 저 제목과 대사, 나 역시도 저 제목이 대사로 나온다면 설경구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의외로 전도연의 것이었다. 아니면 설경구도 같은 대사를 했는데 전도연의 것이 더 뇌리에 남아있는지도 모른다.
이유는 단순하다. 남편은 남성이고 여성은 아내라고 불리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니까. 이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에 반기를 든 것이니 기억에 오래 남을 수 밖에 없다. 물론 대사와 그 발화자만 달랑 떼어놓고 보면 이상하다. 하지만 영화의 전체적인 내용만 놓고 보면 그리 이상할 것도 없다.
남자든 여자든 나이는 꽉꽉 차들어 가는데 평생을 동고동락할 제 짝을 찾지 못한 이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다름아닌 생활이고 일상이라는 것. 혼자서 일어나서 혼자서 씻고닦고 혼자서 밥을 차려먹고 아무런 배웅도 없이 혼자서 출근하고 혼자 퇴근해서 혼자 저녁을 먹고 혼자 남은 시간을 보낸다. 주말이 되어봐야 주변의 친구들은 제 짝이랑 아니면 제 짝과 혹 한두개와 시간을 보내느라 심심할 틈이 없지만 또 혼자서 시간과 말없는 전쟁을 벌여야 한다.
그래서 남자들은 농담처럼 '밥하고 빨래하기 싫어서 장가간다'고 한다. 그러나 단지 밥하고 빨래가 너무 지겨워져서 그런 것이 아니란 것쯤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다만 남자다 보니 게다가 남조선이란 마초국가에서 남자로 살다보니 우는 소리를 하긴 남우세스럽고 해서 해보는 허세라는 거.
만약 '혼자 밥하고 빨래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밥과 빨래를 함께 하는 것'이라면 훨씬 덜 지겹지 않을까? 우습게,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건 어느 정도 사실이다. 모든 인간은 어느 정도는 다들 그런 구석을 가지고 있다. 보살필 대상이 필요하고 그 대상을 보살핌으로서 만족감을 느끼며 심지어 스스로의 존재감까지 확인하는 것. 그게 인간이 가지고 있는 다중적인 모습중의 하나다.
결국 영화속에서나 현실에서나 사람들이 '아내'를 요구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런 이유에서다. 다만 그 지겹도록 반복되는 일상을 자신이 하는 것보다는 누군가가 대신 해주었으면 하는 것이고, 왜 그렇게 되었는지 아직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인류가 일부일처제와 성인남성위주의 가부장제는 가족관계의 첫번째 요소로 정식화한 이후로 그 역할은 '아내'라는 이름으로 여성들에게 부여, 정확히 말하면 강요되었고 남성이나 여성이란 육체적 차이가 그리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세상이 되어버린 요즘에도 여전히 '아내'는 여성들의 몫으로 방치되어 있다.
그러나 지겨운 일이란 누구에게든 지겨운 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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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겹다'고 말하고 나니 김훈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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