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백만년쯤 전에 그러니까 공룡들이 돌아 다니고 호랭이가 담배피우던 시절쯤엔 나도 극장이란 곳에서 영화를 봤었더랬는데 그 때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은 것중의 하나는 남조선 인민들은 결코 엔딩 크레딧을 보지 않는다는 거다. 물론 그 주된 원인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에 조명을 켜고 어서 꺼져버리라고 외치는 깡패같은 극장색희들 때문이긴 하다.
그리고 내 경우에 한 가지 더 추가하자면 굳이 엔딩 크레딧을 보지 않아도 이미 그 영화의 출연진과 감독, 주목할만한 스탭들을 미리 섭렵하기 때문이다. 비싼 돈 내고 딱 한번 볼 수 있는 영화인데 쉽사리 지나친다는 건 사치니까. 그런데 극장이란 델 가지 않게 된 이후론 사실 더 게을러졌다. 원하면 언제든 필요한 부분만 다시 돌려볼 수도 있고 필요한 정보는 나중에 다시 검색해봐도 되기 때문이다. 편리해진 것은 분명한데 또 꼭 그만큼 게을러진 것도 사실이다.
이 영화 마이블루베리 나이츠를 보는 내내 영화를 멈추고 인터넷 검색질을 하고 싶은 충동에 시달린 것이 사실 한 두번이 아니다. 그러다 영화엔 늘 그렇듯 마지막에 엔딩 크레딧이 따라붙는다는 걸 깨닫고 꾹꾹 눌러 참았다. 영화를 보기 전에 내가 알았던 유일한 사실은 감독이 왕가위라는 것 뿐이었으니까. 그리고 인내심을 가지고 엔팅 크레딧까지 기다린 결과 알아낸 매우 중요한 사실 몇 가지.
1. 주연 여배우가 노라 존스다. 처음 보는 귀엽게 생긴 배우라 생각하면서도 어디서 많이 본 듯 싶었다. 사실 내가 일하는 동네에서 심심찮게 마주치는 외국인이랑 닮았다고 생각했었다.
2. 영화 후반에 등장하는 여성 타짜는 나탈리 포트먼이다. 세상에! 도저히 알아볼 수가 없었다. 내 기억속에선 여전히 소녀인데 어느새 한껏 성숙한 이미지가 넘쳐 흐른다.
3. 촬영감독이 다리우스 콘쥐다. 오! 씨바! 역시 그랬구나! 저 날아다니는 듯 몽환적인 이미지들과 카메라에 포착된 대상들의 특징을 샅샅이 핥아주는 시점들, 역시 그랬던 거다.
4. 음악이 라이 쿠더다. 다른 장르의 영화들에도 썩 괜찮지만 역시 로드 무비엔 '닥치고 라이 쿠더'인 거다.
영화도 썩 괜찮았다. 감독이 왕가위라는 것을 알고 그 브랜드의 영화를 기대했던 이들에겐 조금 실망스러웠을 테고, 스토리를 중요시하는 이들 역시 꽤 실망했을지 모르겠지만 난 만족스러웠다. 그 말은 과거 왕가위 감독의 영화들과 비교해 볼때 스타일은 약해졌고 이야기는 풍부해졌다는 걸 의미하고 이걸 또 다른 말로 하면 홍콩 시절 그의 영화가 가벼운 강박증적 화면, 이미지, 인물에 집착했다면 이 영화에선 탐미적인 시선을 강조하는 방식의 전혀 다른 스타일로 변화했다는 의미다.
산천은 유구한데 인걸은 간데없는 것이 아니라 산천이 변하니 인걸도 따라 변한 셈인데 이건 당연한 거다. 홍콩 시절 왕가위표 영화들은 아시아권에선 대중적인 지지를 확보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다른 서구의 국가들에선 매니아들만의 영화였던 걸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자신이 나고 자란 고장의 문화적 취향을 살리는 것이 가장 좋은 문화적 선택이긴 하지만 만약 활동영역을 바꾸기로 결정했다면 다른 선택이 최선일 수도 있다.
블루베리 파이에 아이스크림이 녹아드는 장면을 고속근접촬영으로 보여주는 장면, 재규어 컨버터블의 매끄러운 표면을 빛이 타고 흘러 내려가는 듯한 장면, 엔딩신의 키스씬을 보고 있으면 에로틱하다는 느낌이 드는데 적어도 이런 면은 과거 왕가위 영화들에서 볼 수 없었던 것들이다.
그런 점에서 스타일을 중요하게 여기는 자신의 강점은 버리지 않으면서도 다리우스 콘쥐나 라이 쿠더와 손을 잡고 다른 스타일을 만들어 내는 것은 매우 좋은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그것이 또 다른 왕가위 감독의 스타일이 될 것인지 아니면 낯선 타향에서 살아남기 위한 고육지책인 것인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아 보인다. 다만 내 눈엔 그가 추구한 변화가 아직까지는 꽤나 긍정적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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