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참 지루하다.
재난, 공포, 전쟁 영화란 게 그렇다. 최소한의 기본만 해도 지루해지기 힘들다. 알다시피 이런 영화들은 그 특성상 비쥬얼에 상당한 공을 들일 수 밖에 없으며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조차 성탄절에 바티칸에서 교황이 전하는 말씀이나 석탄일에 큰 스님이 전하시는 말씀처럼 모든 인류에게 뼈가 되고 살이 되는 말씀들이시니 흠을 잡기도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시고 이 영화 지루하다.
일단 주연배우가 영화 내내 긴장감이 안 보인다. 온 인류가 멸망하느냐 마느냐 하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이해하기 힘든 농담을 계속 지껄여대는 건 좀체 납득하기가 힘들다. 시나리오를 누가 쓰고 대사를 누가 구체화시켰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 사람은 '다이하드' 시리즈를 너무 많이 보았거나 아니면 영화라곤 그것밖에 안 본 사람일 것이다. 아! 그리고 영웅물과 재난물의 차이가 무엇인지조차 구분 못 하는 사람일 거다. 시작이 이렇다 보니 별 거 아닌 대사들조차 다 거슬린다.
영화의 메시지역시 마찬가지,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 지구 대재앙때문에 발생할지도 모를 인류의 멸종을 막기 위해 '방주'를 띄울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그 방주엔 이른바 '선택받은 이'들만 탑승가능하다. 나머지는 그냥 다 죽는 거다. 그런데 영화 마지막 장면에 지구에 대 재앙이 닥칠 것을 알아낸 지질학자 한 명이 온갖 난관을 뚫고 방주를 타러 온 이들을 버리고 가는 행위가 비도덕적이라며 절규하고 그 호소가 먹히는 장면이 나온다. - 참고로 난 그 대목에서 웃었다.
문제는 그 지질학자가 애시당초 그 방주 계획에 직접적으로 참여한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지질학자니 지구의 변화만을 점검하는 부분밖에 몰랐다는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 영화에 그렇게 안 나오니까. 그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물론 도덕보다 효율을 먼저 생각하던 한 인물이 막상 심각한 재앙에 직면하여 엄청난 이타심을 발휘하는 인간들을 목격하면서 변화해 간다는 것은 재난물의 대표적인 플롯중의 하나다. 그런데 이 영화에 그런 장면이 얼마나 등장할까? 아쉽게도 그런 장면 별로 없다.
그런데 사실 그보다 더 큰 딜레마가 있다. 방주 계획은 사실 전세계적인 극비에 속하는 계획이었다. 고로 그 방주와 관련된 사실은 탑승할 수 있는 사람들 이외엔 알 수 없는 비밀이었다. 영화 중간에 러시아의 탐욕스러운 부호가 이런 말을 한다. 그 방주에 탑승하기 위해 가족 한 명당 10억 유로를 지불했다고. 이 대사에서 유추해 볼 수 있는 사실은 그 방주의 존재를 알고 탑승하기 위해 온 이들은 적어도 지구 대재앙과 방주에 대한 비밀을 깊이 알고 있는 이들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 이들을 버리고 가는 것이 잘못된 일이라면 바로 눈앞에서 인류 역사상 최악의 재앙이 닥치고 있는 것조차 제대로 모른채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들은 대체 뭐란 말인가? 그들의 죽음은 잘못된 일이 아닌가? 더 큰 잘못엔 '효율'이란 잣대를 들미밀면서 '어쩔 수 없었던 선택'이란 뉘앙스를 풍기면서 작은 잘못엔 '도덕율'을 들이미는 건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위선이다. 비록 현실이 그렇게 굴러간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영화 상영시간 내내 그나마 제일 쓸만한 상황이었을 수도 있었던 장면조차 그저 위선일 뿐이란 이 비극, 영화 2012가 그 자체로 재앙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저 그럭저럭한 비쥬얼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다면 봐도 무방하지만 그것보다 더 많은 걸 바란다면 보지 않기를.
근래 들어 본 영화중 가장 지루하고 가장 어이없으며 가장 산만한 영화였다. 시간이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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