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racism

원전에 대한 소고 3

The Skeptic 2011. 3. 18. 01:07

원전에 대한 소고 3

 

K-19라는 영화가 있다. 미국과 소련이 세계를 사실상 분할 점령하고 대립하던 시절의 사건을 다룬 영화다. 알다시피 그 땐 미국과 소련이 모든 면에서 말도 안 되는 경쟁을 하고 있었던 시절이다. 가장 좋은 예가 바로 단지 얼굴 좀 팔렸고 사람 좋아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대통령이 된 레이건이 소련의 대륙간 탄도탄으로부터 미국 본토를 사수한다며 '스타워즈' 작전을 추진한 것일 게다. 당시에도 수많은 과학자들이 그런 군사작전은 과학적,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했지만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이유는 단순하다. 그들에겐 '실제로 가능한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런 것을 하고 있다'는 것을 상대에게 보여주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보여주기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선 자국민조차도 속여야 했을 뿐이다. 그래서 타당성이나 가능성를 판단할 수 있는 과학자들이나 기술자들의 견해는 정치적으로 탄압을 당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당시는 결국 미국과 소련이란 두 거대 제국이 민주주의를 세계적인 차원에서 말살하던 시기였다. 

 

이 영화 K-19는 비슷한 사건의 소련판이다. 소련의 수뇌부는 미국에게 보여줄 것이 필요했고 그래서 등장한 것이 핵무기를 장착한 잠수함이 미국의 연안까지 진출하여 미국 본토에 핵무기를 '쏠 수도 있다'는 작전이었다. 그래서 추진되었다. 그러나 그 일을 해낼 잠수함은 출항전부터 갖가지 사고에 시달렸다. 이성적이었던 부함장은 출항 불가를 주장했지만 새로운 함장은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소련 수뇌부의 관심사가 어떤 것인지에 더 관심이 많았다. 

 

결국 많은 결함은 안은 채 잠수함은 출항했고 우여곡절끝에 미사일을 시험발사하는데 성공하지만 결국 원자로가 이상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가장 비참한 장면이 펼쳐진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원자력 발전소에서 일하는 모습은 혹여 있을지 모를 방사능의 피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인간의 몸을 물샐 틈 없이 꽁꽁 동여맨 우주인같은 모습이다. 그러나 영화 속 소련의 군인들은 별다른 안전장비없이 고장난 원자로를 수리하기 위해 투입된다. 그들에게 제공되는 안전장치라곤 단 한 가지, 너무 오랫동안 방사능에 노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일정 시간이상을 넘기지 않도록 하는 것 뿐이다. 즉 먼저 투입된 병사가 정해진 시간동안 작업을 하고 나오면 다음 병사가 일정 시간동안 다음 작업을 하는 식이다. 

 

혹자들은 이 장면에 대해서 동료애를 느꼈다거나 감동을 받았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내가 느낀 감정은 말 그대로 '비참함' 그 자체였다. 상상할 수 있는 많은 경우의 수중 최악의 순간이 도래했고 남은 방법은 오로지 한 가지뿐일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꺼이 남은 그 한 가지 방법을 선택한다. 그들이 특별한 사람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상황에선 그런 사고와 행동을 하는 것이 일반적일 뿐이다. 난 그런 모습에서 동료애니 감동이니 하는 걸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느끼는 것은 '대관절 일이 저 지경이 되도록 만든 것이 무엇이고 왜 그렇게 된 것일까?'하는 의문이다. 

 

일본의 지진과 쓰나미에 이어 원자력 발전소 사건이 연일 보도되고 있다. 매체에 따라 구체적인 숫자는 다르지만 그 엄청난 원전 사고를 막기 위해 방사능 피해, 결국 목숨를 걸고 원전 폭발을 막기 위해 매달리는 이들에 대한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물론 영화는 탈출구가 없는 잠수함이란 극한적 상황이었지만 지금 일본은 영화와는 분명히 다른 상황이기에 그들의 선택은 두고두고 박수받고 존경받을만한 행동이다. 

 

그런 한 편 난 그들의 죽음을 각오한 행동을 보면서도 역시 같은 질문, '대관절 일이 저 지경이 되도록 만든 것이 무엇이고 왜 그렇게 된 것일까?'하는 의문을 지울 수가 없다. 일본은 사실 많은 면에서 우리와 비슷한 나라다. 그 때문에 내 의문은 더더욱 강렬할 수 밖에 없다. 이번 대재앙이 어떤 식으로든 정리가 되면 분명히 사건에 대한 진지한 고찰과 반성이 뒤따라야 할 테지만 그것이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우리 나라는 그런 게 제대로 이루어져 본 역사가 없다. 그리고 그런 점은 일본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과연 목숨을 걸고 원전 그리고 일본의 안전 어쩌면 전 세계의 안전을 위해 싸우고 있는 이들의 노력은 어떤 식으로 보상받을 수 있는 것일까? 역사에 기록되고 교과서에 이름이 등장하는 것 같은 것일까? 이미 불행한 사건이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똑같은 사건이 벌어질 가능성을 안은 채로 그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게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일까? 

 

늘 강조하지만 난 감정적이거나 감상적인 것보다는 실질적인 걸 더 선호한다. 그리고 그것이 역사에 기록되고 사람들의 머리와 가슴에 남은 이들을 진정으로 기리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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