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진보는 옆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 가는 것"
통진당의 참여당 계열과의 합당에 대한 비판이다. 최근 일이 클어져서 대두된 것이 아니라 합당 당시부터 있었던 지적이다. 그런데 그 때나 지금이나 난 좀 의아하다. 대관절 무엇을 기준으로 '옆'과 '아래'를 구분한다는 말인가? 단순히 정당정치에 참여하는 정치세력이란 의미에서 참여당 계열은 '옆'이 되고 정치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대다수 사람들은 '아래'가 되는 것일까? 존재 형태를 구분점으로 삼는 것을 틀렸다고 말하긴 그렇지만 지나치게 단순하다는 느낌까지 지울 순 없다.
그런데 더 난감해지는 건 그런 의미가 아니라면 과연 무슨 기준으로 '옆'과 '아래'라는 구분이 가능한 것일까? 대체로 이런 비판의 최종적 결론이 자신들의 이념적 지향을 지켜내며 대중들과 호흡을 함께 하겠다는 의지를 되새기겠다는 쪽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고 그런 경우라면 그나마 이해는 된다.
그리고 예전 운동권들처럼 대중들을 단순한 계몽의 대상으
로 바라볼 것이란 의미에서 '아래'라는 표현을 사용했을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찜찜한 이유는 이 '아래'라는 표현은 자기네들끼리 서로 잘 알고 지내는 이들, 즉 정서적 믿음이란 공감대가 형성된 관계가 아니라면 분명히 오해의 여지가 충분한 단어다.
그렇다고 내가 분명한 수준 차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사람들은 다 저마다 관심사가 다르고 그 수많은 관심사들중 일부분에서 진보세력이 다른 사람들보다 나을 뿐이란 사실이다. 그것 역시도 분명 대단한 재주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다른 모든 재주들을 압도하는 결정적인 기준점이라고 단정할 순 없다.
대중들이 아니라 구체적인 한 개인을 상대하더라도 그 상대방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과 존중받으며 의견을 교환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매우 다르다. 전자는 대결을 낳고 후자는 공감과 협력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외도와는 상관없이 '아래'라는 단어가 풍기는 뉘앙스는 분명 부정적이다.
그렇다고 내가 분명한 수준 차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사람들은 다 저마다 관심사가 다르고 그 수많은 관심사들중 일부분에서 진보세력이 다른 사람들보다 나을 뿐이란 사실이다. 그것 역시도 분명 대단한 재주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다른 모든 재주들을 압도하는 결정적인 기준점이라고 단정할 순 없다.
대중들이 아니라 구체적인 한 개인을 상대하더라도 그 상대방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과 존중받으며 의견을 교환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매우 다르다. 전자는 대결을 낳고 후자는 공감과 협력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외도와는 상관없이 '아래'라는 단어가 풍기는 뉘앙스는 분명 부정적이다.
2.
진보가 무임승차를 들먹인다는 걸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개인적인 판단이지만 난 진보란 무임승차를 허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보는 편이다. 그건 진보가 꼭 대중정당 혹은 수권정당을 목표로 삼지 않더라도 충분히 세상을 좋은 방향을 이끌어 갈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아니 좀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런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 진보여야 한다고 보는 편이다. (남한에서 진보를 자처하려면 열라 공부많이 해야 하는 이유다)
만약 그런 것이 아니라 국가권력이 목표라면 지금 당장의 현실적인 차원에서 볼때 '아래'만이 아니라 '옆'으로 확장하는 것도 필요한 기술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아주 먼 미래를 바라보는 것을 전제한다면 굳이 '옆'으로의 확장이 그렇게 시급한 일은 아니라고 볼 수도
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념 정당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대중정당, 수권정당이 된다는 것은 현재 남한의 이념적 지형상 그리 녹록한 일은 아니다. 게다가 단순히 내부의 노력만이 아니라 외부적인 변화역시 큰 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자본주의의 발전이 그 한계에 다다르고 부의 집중 현상이 극단적이 되면 사회적 불안정은 늘어가고 그 과정에서 노동계급의 각성이 높아지고 사회는 다시 한 단계 변화할 것이라는 바로 그것 말이다.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이 진행과정의 초반부는 변화를 추동하는 노동계급의 능동적인 개입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외부적 요소에 의한 변화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 외부적인 변화란 것이 교과서식으로 말하면 분명 진보에게 이롭게 작용할 가능성이 높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교과서적인 해석일 경우에만 적용가능하다는 점, 그리고 그 과정은 대다수 대중들에겐 너무나 힘든 여정일 것이란 점이다.
고난은 사람을 단련시키기도 하지만 그 역시도 고난을 그렇게 받아 들이는 이들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다. 그런 준비가 안 되어 있는 이들에게 고난이란 단련이 아니라 그저 짜증과 자포자기, 무관심의 계기가 될 뿐이다. 막스 할배의 유물론을 지나치게 교조적으로 해석하는 이들은 물질적 변화가 사회 구성을 변화시키고 나아가 개인의 가치관마저도 변화시킬 것이라고 주장한다. 대부분의 경우 맞는 해석이다. 그러나 알다시피 우리는 그 반대의 경우들도 많이 목격했다.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념 정당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대중정당, 수권정당이 된다는 것은 현재 남한의 이념적 지형상 그리 녹록한 일은 아니다. 게다가 단순히 내부의 노력만이 아니라 외부적인 변화역시 큰 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자본주의의 발전이 그 한계에 다다르고 부의 집중 현상이 극단적이 되면 사회적 불안정은 늘어가고 그 과정에서 노동계급의 각성이 높아지고 사회는 다시 한 단계 변화할 것이라는 바로 그것 말이다.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이 진행과정의 초반부는 변화를 추동하는 노동계급의 능동적인 개입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외부적 요소에 의한 변화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 외부적인 변화란 것이 교과서식으로 말하면 분명 진보에게 이롭게 작용할 가능성이 높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교과서적인 해석일 경우에만 적용가능하다는 점, 그리고 그 과정은 대다수 대중들에겐 너무나 힘든 여정일 것이란 점이다.
고난은 사람을 단련시키기도 하지만 그 역시도 고난을 그렇게 받아 들이는 이들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다. 그런 준비가 안 되어 있는 이들에게 고난이란 단련이 아니라 그저 짜증과 자포자기, 무관심의 계기가 될 뿐이다. 막스 할배의 유물론을 지나치게 교조적으로 해석하는 이들은 물질적 변화가 사회 구성을 변화시키고 나아가 개인의 가치관마저도 변화시킬 것이라고 주장한다. 대부분의 경우 맞는 해석이다. 그러나 알다시피 우리는 그 반대의 경우들도 많이 목격했다.
결국 진보가 대중정당, 수권정당이 되기 위해선 대중들에게 변화의 가능성, 그것도 구체적인 가능성을 보여주어야 하고 그 가능성에 대해 합의를 볼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앞 부분에서 언급한 기초적인 관계정립에 대한 능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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